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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과학이 보여주는 진취적 기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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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과학철학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과학철학

옛날 인간들은 세상이 평평하다고 믿었다. 국지적으로는 산과 계곡 등 여러 가지 지형이 있지만 큰 그림을 볼 때는 거대한 평지에 약간 울룩불룩한 정도이지 않은가. 그리 멀리 어디 가 보지 못한 사람들이 지구가 둥글다고 상상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유럽의 천문학자들은 그래도 꽤 오래전부터 지구는 둥글고 그것이 우주의 중심에 있으며 모든 천체는 그 주위를 돈다고 생각했는데, 중국 등 다른 지역에서는 땅덩이가 공 모양이라는 ‘지구’ 개념을 강력히 거부했다고 한다. 그 중 한 가지 이유는 중국이 글자 그대로 세계의 중심에 있는 국가여야 하는데, 구형의 표면에는 중심이 있을 수 없다는 문제였다고 한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
증거를 편한 대로 선택해서 해석
과학은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자세
항상 더 배우고자 하는 게 진취성

그런데 요새도 지구가 평면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상하게 선진국에는 더 많다. 과학자처럼 그 지구평면설(또는 지평설)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하는 사람들도 꽤 있으며, 자기들끼리 모여서 정기적 학회를 열고 서로 연구결과 발표도 활발히 한다. 소위 ‘지평인’이라 일컬어지는 이들은, 도리어 자기들을 깔보고 비웃는 ‘지구인’들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맹신하도록 세뇌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평인들은 증거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증거를 아주 선별적으로 취급하며 특이하게 해석한다. 지구가 명백히 동그랗게 보이는 사진도 나사(NASA)와 같은 정부기관에서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아니, 당신이 직접 우주선을 타고 올라가서 본 적은 없지 않은가.) 한편 자기들 주장에 도움이 되는 증거가 어쩌다 나오면 그것을 다들 인용하며 되풀이한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어떤 배가 굉장히 먼 거리에 나갔는데도 해안에서 그 모습이 보였다는 보고가 있었다. 지구가 둥글다면 그 굽어 있는 물의 표면을 따라 나간 배가 어느 정도 멀어지면 시야에서 수평선 밑으로 들어가므로 모습이 사라져야 한다. 지구가 둥글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이상한 관찰결과를 일시적인 대기현상 때문에 일어난 빛의 굴절이 빚은 착시였다고 해석한다. 그러면 지평인들은 지구인들이야말로 편한 대로 증거를 왜곡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미국의 과학철학자 리 매킨타이어(Lee McIntyre)는 이런 식으로 과학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많은 고민을 하는 학자 중 하나다. 그는 그들을 우리가 무조건 무시하고 짓눌러서는 안 되고 그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려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지평인들이 정말 어떤 생각과 주장을 하는지를 직접 체험하기 위해 2018년도 국제 지평설 학술대회에 참석하였고 거기서 지평인들과 진지한 대화를 시도했다. 지평설이 옳다면 이러이러한 관측과 실험결과가 나와야 할 것이고, 그것을 같이 시험해 보자고 권했다. 한 예로, 현재 주류 지평설에 의하면 납작한 원형으로 생긴 세상의 중심은 북극이다. 남극이란 것은 없고, 그 대신 엄청난 길이의 바깥쪽 원주에 얼음벽이 쳐 있다. (재미있는 것은 유엔 깃발을 보라. 거기에 나온 세계지도는 바로 이런 형태이다.) 지평인들은 그렇기 때문에 지구인들이 ‘남반구’라고 말하는 외곽지역에서 동서의 거리는 지구인들이 믿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길다고 본다. 예를 들어 남아메리카에서 뉴질랜드까지 가는 거리는 너무 멀어서 직행 항공편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항로가 있지 않은가? 매킨타이어는 지평인 한명과 거기에 대한 내기를 하게 되었다. 매킨타이어가 있다고 주장하는 그런 비행기를 타 보기로. 그런데 그 약속을 했던 지평인은 결국 시험장에 나오지 않았다.

매킨타이어는 과학적 태도의 정수는 증거에 따라 기꺼이 이론을 바꿀 용의가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포퍼(Karl Popper)의 그러한 주장에서 영감을 얻는다. 과학적 태도가 안 된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장 아끼는 믿음이 흔들리게 될까 봐 진짜로 새로운 경험은 피한다. 그와 정반대인 것은 항상 뭔가 새로운 것을 배워보려는 과학자의 욕망이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과학자라 하는 사람들도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이론만 계속 믿고 입증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일 때가 있다. 그것은 특정한 과학이론을 종교처럼 숭배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그런 잘못된 과학자 집단은 파벌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과학적 태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하는 과학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참 어려운 것은 과학을 공격하는 사람들까지도 과학적 태도로 대해주는 일이다. 과학도 틀릴 수 있고 과학지식은 항상 개선되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과학지식이 완벽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들어갈 필요가 있다.

진취적 기상을 살려야 한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많이들 하는 이야기다. 옛날 학교에서 도덕 시간에도 배웠던 기억이 나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전통이 서양과학의 정신과 제대로 통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선호하는 이론만 방어하는 소극적이고 침체된 태도를 벗어나서, 자신의 현재 믿음에 안주하지 않고 그것을 버릴 각오를 하고 새로운 것을 배워 나가자는 과학의 정신이 정말 진취적 기상이 아닐까.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과학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