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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민우의 시시각각

이재명 제치니 정청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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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최민우 기자 중앙일보 정치부장
최민우 정치부장

최민우 정치부장

이재명 민주당 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을 앞두고 여권에선 “그냥 부결시키는 게 더 낫지 않을까”라는 말이 돌았다. 민주당이 이재명 간판으로, 방탄 이미지로 총선을 치르는 게 여권에 더 유리하지 않겠냐는 의미였다. 체포안 가결로 이 대표가 수감되고 퇴출당한 뒤 제1야당이 환골탈태해 거듭나면 국민의힘엔 오히려 악재라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전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현재 민주당 돌아가는 판세는 최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22일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진교훈 강서구청장 후보 등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스1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22일 서울 중랑구 녹색병원에서 진교훈 강서구청장 후보 등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스1

 21일 표결 당일 밤, 온건파 박광온 원내대표를 완력으로 몰아낸 건 ‘친명 일극체제’의 서막이었다. 당 투톱(당대표ㆍ원내대표)이 부재하자 이튿날 회의에서 마이크를 잡은 건 강경파 정청래 최고위원이었다. 그는 가결표 의원을 겨냥해 “인간으로 해서는 안 되는 비정한 짓을 저질렀다. 제 나라 국민이 제 나라를 팔아먹었듯, 자기 당 대표를 팔아먹었다”면서 “윤석열 정부 정적 제거 공작에 놀아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해당 행위다.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정치생명을 끊어놓겠다”는 노골적인 협박에 비명계는 허겁지겁 ‘부결 인증’을 공개하거나 “당원들이 사퇴하라면 사퇴하겠다”(고민정 최고위원)며 꽁무니를 빼기 바빴다. 계파 대격돌이니 반란 운운은 언감생심이었다.

체포안 가결로 당 변화 예상 깨고
비명 숨죽인 채 친명색채 더 강화
구속돼도 '이재명 체제' 굳건할 듯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2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촛불행동 집회에서 지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21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촛불행동 집회에서 지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당 밖은 더 흉흉했다. 표결 직후 친야 커뮤니티엔 ‘수박 당도 측정법’이란 게 유포됐다. 체포안 표결이 무기명 투표라 가결표 색출이 현실적으로 어렵자, 이를 추정할 수 있는 지표를 만든 것이다. ‘개딸’의 거듭된 요구에도 ▶공개적으로 부결 의사를 표명하지 않은 자 ▶부결 여부를 묻는 문자ㆍ전화에 답변하지 않은 자를 우선 추리고, 이 대표 단식 중에 ▶농성장을 방문하지 않은 자를 포함하면서,  ▶지난 7월 ‘불체포특권 포기 선언’에 동참한 자(31명) ▶검사 탄핵소추안 발의에 불참한 자(62명) 등 공식 수치를 취합한 것이다. 지표 중 4개 이상 해당하는 현역 의원은 ‘수박 당도 4 혹은 5’로 측정돼 가결 확실로, ‘당도 1ㆍ2’는 가결 의심으로 분류된다. 단지 추정에 불과한 이 같은 ‘가결 리스트’가 내년 민주당 총선 공천을 좌우할 것이라고 한다.

 이 대표 구속을 전제로 한 ‘옥중 공천’을 넘어, 이 대표 본인도 인천 계양을에 ‘옥중 출마’할 것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하다. 비명계에겐 이 대표의 구속영장 기각이 외려 숨통을 틔워줄 것이라는 관측마저 나온다. 이 대표가 풀려나면 통 큰 정치인으로 포지셔닝을 하기 위해 포용의 제스처를 취할 테지만, 이 대표가 수감돼 현재처럼 ‘극성 친명계’가 더 설치는 상황이 오면 비명계 공천 학살은 예정된 수순이라는 설명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 단식농성장에서 한 시민이 절을 하자 만류하고 있다. 뉴스1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 단식농성장에서 한 시민이 절을 하자 만류하고 있다. 뉴스1

 ‘이재명 제거’가 민주당 변화의 트리거가 되기는커녕, 이처럼 더 극렬한 ‘이재명 시즌2’로 변질되는 건 왜일까. 민주당 지지자 상당수가 심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현재의 윤석열 체제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다. 특히 이 대표 단식 농성장에서 큰절을 올린 여성을 떠올려 보라. ‘이재명교(敎)’에 교화된 신도(개딸)에게 윤석열 정부는 ‘지옥불’인 것이다. 그런 엄혹한 현실에서 내 편의 작은 허물을 들추다니, 그건 용서될 수 없는 반역이다. 혹여 윤 대통령이 이 같은 개딸 정서를 간파하고 강경 기조를 여태껏 유지했던 것이라면, 가히 정치 9단이 아닐 수 없다.

 2017년 대통령 탄핵-대선 패배 이후 자유한국당은 이듬해 지방선거에서도 2대14(광역단체장)로 참패했다. 우파 진영에선 그게 바닥이라고 여겼다. 아니었다. 지하는 더 깊었다. 당명만 바꾸었을 뿐 황교안 대표가 들어서면서 우파 성향은 더 뚜렷해졌고, 그 결과는 2020년 총선에서 역대급 패배였다. 하물며 대선에서 0.73%포인트 차로 석패했고, 168석이나 가진 거대 야당이 스스로 혁신한다? 교과서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다. ‘이재명 체제’는 어떤 우여곡절에도 내년 총선까지 갈 것이다. 지하실로 들어서기엔 아직 빛이 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