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김명수 대법원장의 퇴임사는 2017년 취임사 때처럼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했다. “대법관님들과 각급 법원 원장님들”(양승태), “전국의 사법부 구성원 여러분”(이용훈)을 부른 전직 대법원장과 비교된다. 취임사에서 “사법부가 국민에게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보답은 좋은 재판”이라고 강조한 김 대법원장은 ‘중앙집권적 사법행정 권력’을 해체해 법원에 수평적 문화를 도입했다는 평가와 함께, 사법행정이 무력화 되면서 재판 지연이 심해져 ‘신속한 재판’을 받을 국민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아야 했다.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 6년, 어떤 일이 있었을까.
1. 대법원장 된 춘천지방법원장
“저의 대법원장 취임은 그 자체로 사법부의 변화와 개혁을 상징하는 것입니다.”(2017년 9월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사)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8월 김명수 당시 춘천지방법원장을 차기 대법원장으로 지명했다. 김 대법원장은 전임 양승태 대법원장보다 열 세 기수 아래로, 당시 대법관 13명 중 9명이 선배였고 동기 중에도 대법관이 없었다. 대법관 출신이 아닌 역대 세 번째 대법원장이기도 했다. 김 대법원장은 후보자 시절, 대법원 첫 출근길에 시외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오기도 했다.
2. 법원 온 文 “사법부 잘못 바로잡아야”
“사법농단·재판거래 의혹이 사법부에 대한 국민 신뢰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2018년 9월 대법원에서 열린 사법부 70주년 기념행사.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작심 발언을 이어갔다. 판사들에게 ‘사법행정권 남용’ 검찰 수사에 협조하라고 직격한 것이다. 김 대법원장은 이 자리에서 “철저한 진상규명과 관련자들에 대한 엄정한 문책이 필요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대법원은 2017년 4월부터 1년간 세 차례 자체 조사를 벌이는 등 ‘법원 내 해결’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날 이후 검찰 수사에 사실상 문을 열어줬다.
3. 승소하고도 눈물 흘린 이춘식 할아버지
"재판을 오늘 와보니까 혼자 있어서 슬프고 초조합니다. 울고 싶고 마음이 아파요.” 2018년 10월 30일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최종 승소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당시 94세)씨가 대법원에서 눈물을 쏟아냈다. 13년만의 승소였다. 17살 때 강제징용됐던 이씨는 다른 피해자 3명과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재상고심 확정 판결이 미뤄지는 사이 다른 피해자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김명수 대법원은 이밖에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한 노동자의 뇌종양을 산재로 인정하고,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처분은 위법하다는 등의 판결을 내렸다.
4. 박병대·고영한 구속영장 기각된 날…“불가피한 선택”
2018년 12월 7일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박병대·고영한 대법관의 영장이 기각됐다. 같은 날 김 대법원장은 대법원에서 열린 전국법원장 회의에서 “사법부가 겪고 있는 지금의 아픔은 신뢰받는 사법부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 하는 성장통”이라며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해) 조사와 수사협조의 뜻을 밝힐 때마다 신중히 결정했고, 지금도 그 결정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서 김 대법원장은 고등법원 부장판사 중 일부가 돌아가면서 맡던 법원장을 일선 판사들이 추천한 후보군 중 대법원장이 임명하는 ‘법원장 후보 추천제’를 시범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5. 3개월만에 열린 전원합의체…마스크 등장한 대법원
코로나19는 대법원도 멈춰세웠다. 한 달에 한 번 이상 열리던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는 2020년 2월 이후 3개월 간 열리지 않다가 5월에 재개했다. 김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은 마스크를 쓰고 대법정에 들어왔고, 가림판을 사이에 두고 앉아야 했다. 법원행정처는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격상되자 수도권 법원에 재판 기일을 연기하거나, 직원들에 재택근무를 할 것을 권고했다.
6. 거짓말 논란에 대법원 앞 ‘김명수 사퇴’ 화환
“김명수 탄핵.” 2021년 2월 서울 서초동 대법원 정문과 후문 사이 인도에 근조 화환 수십 여개가 들어섰다. 화환엔 거짓말 논란에 휩싸인 김 대법원장을 규탄하는 문구가 빼곡히 적혔다. 김 대법원장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국회에서 탄핵이 거론되던 임성근 전 부산고법 부장판사의 사표 수리를 거부했다. 탄핵을 용인하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김 대법원장은 부인했지만, 임 전 부장판사가 김 대법원장과의 대화 녹취를 공개하자 인정하고 사과했다. 김 대법원장은 해당 사건으로 형사고발돼 현재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7. 오경미 취임…여성 대법관 4명 시대
2021년 9월 이기택 전 대법관 후임으로 오경미 대법관이 임명되면서 박정화·민유숙·노정희 대법관과 함께 역대 두 번째 ‘여성 대법관 4명’ 시대가 열렸다. 박정화·조재연 대법관 후임으로 서경환·권영준 대법관이 취임하면서 여성 4인 대법관 시대는 669일만에 끝났다. 김 대법원장은 2018년 특허법원장에 조경란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올해 울산지법원장에 서경희 전 대구가정법원장을 임명하는 등 임기 중 총 6명의 여성 법원장을 임명했다. 하지만 국제인권법연구회 등 특정 연구회 출신이나 측근으로 분류되는 인사를 편애한다는 ‘코드인사’ 논란도 이어졌다.
8. 사법행정자문회의 설치…수평적 문화 확산
“사법행정자문회의 자문에 기초한 인사가 이뤄졌음.” 언젠가부터 법원 인사엔 이 같은 표현이 따라붙는다. 2019년 8월 출범한 상설 자문기구인 사법행정자문회의는 외부인사들의 자문을 통해 대법원장의 제왕적 권한을 분산하는 걸 목표로 했다.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김명수 사법부가) 사법행정자문회의와 분과위원회의 운영, 전국법관대표회의와 분과위원회의 지속적인 활동, 각급 법원 사무분담위원회 설치 등으로 수평·분권·개방적 구조의 사법행정을 도모했다”고 평가했다.
9. 형사재판 전자소송 도입
형사재판 전자소송 도입은 김 대법원장이 임기 중 가장 큰 성과로 꼽은 일이다. 2021년 10월 ‘형사사법절차에서의 전자문서 이용 등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면서, 형사재판에 전자소송을 도입할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법원은 2026년부터 형사재판 전자소송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김 대법원장은 지난 1일 “법무부·경찰·검찰·해양경찰·공수처까지 협의해 전자소송을 도입하게 됐고, 시행 이후 국민, 소송 관계자, 법원 구성원들에게 편리하고 유익할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라고 했다.
10. 윤석열 대통령과 ‘불편한 동거’
2019년 검찰총장 취임 후 첫 일정으로 김 대법원장을 예방했던 ‘검찰총장 윤석열’은 3년 뒤 대통령에 당선돼 김 대법원장과 불편한 동거를 시작했다. 노동조합 불법 쟁의행위 책임을 따질 때, 개인의 지위와 역할에 따라 손해 정도를 서로 다르게 계산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른바 ‘노란봉투법’ 판결)이나 대법관 임명 등을 두고 대법원과 대통령실 사이엔 계속 미묘한 기류가 감지됐다.
11. 부산에도 문 연 회생법원
올해 3월 부산회생법원과 수원회생법원이 문을 열었다. 서울에만 있던 회생법원을 확대한 것이다. 김 대법원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경제 위기의 여파로 한계 상황에 처하게 된 기업과 개인에게 보다 효율적이면서도 신속한 자립의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2019년엔 수원고등법원과 수원가정법원이, 올해 초엔 창원가정법원이 개원하는 등 김 대법원장 임기 중에 서울 외 지역에서 여러 법원이 문을 열었다.
12. “기대 미치지 못해…저의 탓”
김 대법원장의 퇴임식은 이균용 차기 대법원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표류 중인 가운데 열렸다. 김 대법원장은 재판 지연 심화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듯 “정의의 신속한 실현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가치이지만, 충실한 심리를 통해 정의로운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는 우리의 방향도 결코 되돌릴 수 없다”고 했다. 퇴임사 말미, 그는 “제 불민함과 한계로 국민 여러분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며 “모쪼록 모든 허물은 저의 탓으로 돌려 꾸짖어 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