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젠 이성보다 감성, 나보다 우리…서울대 '진리는 나의 빛'부터 넘어서야"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858호 02면

유홍림 서울대 신임 총장

학생들이 힘을 합쳐 축제 준비를 하고 있던 지난 11일, 유홍림 서울대 총장은 “협업과 소통·공감이 필요한 시대”라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학생들이 힘을 합쳐 축제 준비를 하고 있던 지난 11일, 유홍림 서울대 총장은 “협업과 소통·공감이 필요한 시대”라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서울대 기숙사가 재건축에 들어간다. 입구-복도-방으로 이어져 왔던 기숙사 내 동선에 몇 곳이 추가된다. 그중 하나가 ‘미팅룸’ 혹은 ‘미팅 홀’ 성격의 공간이다. 남녀 만남의 그 미팅이 아니다.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경청과 숙고의 미덕을 공유하며, 진중한 논의를 거치는 장소다. 미국 ‘카운티 홀 미팅(county hall meeting)’의 축소판쯤 된다. ‘자는 곳’이라는 뜻이 강한 기숙사(dormitory)라는 표현 자체부터 바꿔야 할 판이다.

유홍림(62) 서울대 신임 총장은 “앞으로 신입생 3500여 명 모두 거주형 대학(Residential College·이하 RC)에서 생활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기숙사가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부대끼며 생활하고, 운동하고, 공부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한다는 얘기다. 지난 11일, 서울대 관악캠퍼스 총장실에서 유 총장은 금빛으로 수놓인 대학 정장을 가리켰다. 흔히 ‘샤(국립서울대의 앞글자를 따온 ㄱ, ㅅ, ㄷ의 조합)’라고 부르는 대학 정문 이미지와 펜·횃불·월계관. 그리고 책 위에 새겨진 표어 ‘베리타스 룩스 메아(veritas lux mea).’ 유 총장은 “이제는 이 책의 한 페이지를 넘겨야 한다”고 말했다.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뜻으로, 1946년 개교 때 초대 총장 해리 앤스테드가 도입했다는 표어에 대해 지금의 28대 총장은 “넘어서야 한다. 새로운 내용이 추가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과 감성, 학문과 기술 칸막이 없애야

표어의 내용을 업그레이드 하는 것인가.
“사실 ‘진리는 나의 빛’은 이성(理性) 중심의 교육관이다. 개인주의적으로, 심지어 일부에서는 이기주의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제 서울대는 감성의 역량이 더 강조돼야 한다. 앞으로의 시대는 불확실성의 시대, 정답이 없는 시대다. 혼자서는 대처할 수 없다.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도 말하지 않았나. 현재의 지구 위기는 협업이 해답이라고. 소통과 다양한 의견이 필요하다. 공감(sympathy)과 동감(compassion)이 미래 대처에 필요한 덕목이다. 지능지수(IQ)보다 감성지수(EQ)고 로고스(이성을 향한 열망)보다 에로스(감성을 향한 열망)가 중요해지는 시대다. ‘진리는 나의 빛’이라는 현재의 표어에 아펙투스 클라모르 노비스(affectus clamor nobis), 그러니까 ‘열정은 우리의 함성’이라는 뜻을 더해야 할 것이다.”
국립서울대학교의 앞글자 ㄱ, ㅅ, ㄷ을 따서 만들어 흔히 ‘샤’로 부르는 서울대 정문. [사진 서울대]

국립서울대학교의 앞글자 ㄱ, ㅅ, ㄷ을 따서 만들어 흔히 ‘샤’로 부르는 서울대 정문. [사진 서울대]

기숙대학의 개념도 공감과 동감을 강조하면서 나온 것인가.
“현재 240여 명의 신입생을 포함해 300여 명이 RC의 시범 운영 단계인 LnL(Living and Learning)에 참여하고 있다. 경쟁률이 4대 1이었다. RC의 개념은 다른 학교에도 있지만, 서울대는 차별성을 두고 있다. 스스로 규칙을 만들고 갈등을 해결하며 모둠강좌를 통해 서로 다양한 의견을 공유하고 있다. 스스로 탐구 주제를 선정하기도 한다. 지난 5월에는 정은경 전 질병청장의 강연도 있었다. 뒤섞이면서, 부대끼면서, 더불어 하면서 가치를 일깨우는 것이다.”
예산이 문제일 텐데.
“기부가 해결책이 될 것이다. RC의 하우스(동·棟)마다 기부자 혹은 기부 기관의 이름이나 상징을 넣겠다. 단순한 거주공간이 아닌, 또 다른 배움의 용광로인 그 하우스에서 대한민국 인재가 나온다면, 기부자들도 얼마나 뿌듯하겠나.”
서울대가 추구하는 인재는.
“융·복합형 인재다.”

융·복합(融·復合)은 단순히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스며들며 새로운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을 표방하며 유행처럼 쓰이지만, 모호한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다. 구호에 동원되는 두루뭉술한 단어에 그칠 수 있다. 그러나 유 총장은 명확하게 융·복합형 인재에 대해 짚었다.

융·복합형 인재라면.
“분명 서울대를 비롯한 우리 대학들은 인성과 직업적 능력, 전문 지식 배양에 있어서 성과가 있었다. 국가 산업과 경쟁력 제고에도 성취가 있었다. 하지만 부분적이었다. 따로 노는 것이다. 부분과 부분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칸막이를 없애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현실적인 도전과 위기는 복합적이다. 이성과 감성의 칸막이를 없애야 한다. 인성과 지성의 칸막이를 없애야 한다. 학문과 기술의 칸막이를 없애야 한다. 너와 나의 칸막이를 없애야 한다. ‘나’보다 ‘우리’가 돼야 하고, ‘이성’에 ‘감성’을 더해야 전체적인 혁신이 이뤄져야 한다. 에로스와 파토스(감성과 공감), 디오니소스적인 자유, 컴패션(동감)은 이런 혁신의 바탕이다. 다양성을 수용하는 태도와 소통·협업·공감 능력, 영역을 넘나드는 통합적 사고와 기성 관념에 도전하는 비판적 사고를 갖춘 유연한 지성인이 미래 인재다.”
거주형 대학(RC)으로 변모하기 위해 재건축에 들어갈 서울대 기숙사. [사진 서울대]

거주형 대학(RC)으로 변모하기 위해 재건축에 들어갈 서울대 기숙사. [사진 서울대]

유 총장이 그리는 서울대의 미래에는 그가 가르친 정치사상이 배어 있다. 유 총장은 청주고를 졸업한 뒤 1980년 서울대에 입학, 동 대학원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이홍구 교수의 지도로 정치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4년 미국 럿거스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로 서양정치사사상, 현대정치사상을 가르쳤다. 한국정치사상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서울대의 융·복합형 인재를 길러내기 위한 또 다른 실행 방안들은 보다 구체화한다.

첨단융합학부를 신설하기로 했는데.
“내년도부터 ▶디지털헬스케어 ▶융합데이터과학 ▶지속가능기술 ▶차세대지능형반도체 ▶혁신신약 등 5가지 전공의 첨단융합학부가 인재를 양성하게 된다. 학생들은 입학 이후 3학기 동안 공통 교과목을 들으며 본인의 관심사를 찾아 4학기째에 전공을 택한다. 입학 후 1~2년이 가장 중요하다. 진로와 가치관이 결정되는 시기다. 진로를 스스로 택하는 만큼 성취도가 높을 것으로 보인다. RC와 연계하고 기존의 자유전공학부·기초교육원과 함께 서울대가 추진하는 학부대학의 하나가 될 것이다. 소통과 협업을 바탕으로 한 미래 인재를 배출하는 효과가 클 것으로 기대한다.”
바이오메디컬 분야도 융·복합 차원에서 추진할 수 있겠다.
“그렇다. 기초부터 임상까지, 공대·농생대·약대·자연대·수의대 등 인적 물적 인프라를 이만큼 가진 곳이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드물다. 가장 강점이 바이오메디컬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서울대 시흥캠퍼스는 바이오메디컬의 중심축이 될 것이다. 향후 한국형 보스턴바이오클러스터 구축에 중추적 역할을 하고자 한다.”

‘한국형 보스턴바이오클러스터’에 참여

미국 보스턴에는 매사추세츠공대(MIT)·하버드대 등 주요 대학과 글로벌 제약·바이오 기업과 연구소, 벤처기업 등 1000여 곳이 시너지를 내며 미국 바이오산업을 이끌고 있다. 지난 4월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이 ‘보스턴바이오클러스터’를 직접 찾기도 했다. 정부는 지난 6월 첨단산업 글로벌 클러스터 전략회의에서 한국형 보스턴클러스터를 구축한다고 했다. MIT의 기술과 서울대병원의 데이터를 결합해 데이터 기반 융합연구를 하는 방안 등이 이 프로젝트의 추진 과제로 거론되기도 했다. 문제는 예산과 규제다. 정부는 해당 기업의 세액 공제를 최대 35%까지 늘리고, 클러스터 내 해외 인재의 소득세를 10년간 50% 감면해 주기로 했다. 유 총장도 이런 ‘예산과 규제’ 해결이 서울대의 국제경쟁력 선결 과제라고 진단했다.

국제경쟁력을 위한 전략이 있나.
“서울대는 최근 10년간 QS 세계대학평가 30위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했지만, 올해는 41위를 기록했다. 평가 지표가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국제 연구 네트워크’ ‘지속가능성’ 지표에서 부진했다. 대내외, 국내외 우수 인적 자원을 확보해 전략적 국제 공동연구를 확대해야 한다. 충분한 재정도 필수다. 특히 유학생과 교수 등 외국인 인재 확보도 중요하다. 외국인 학생과 외국인 교수의 입국 절차부터 생활까지 훨씬 유연해져야 한다. 비자, 건강보험, 집값 대출 등 걸리는 곳이 많다. 영미권뿐만 아니라 동남아·중동·남미 출신도 중요하다. 이들은 유학생과 외국인 교수에 그치는 게 아니다. 지역 주민이기도 하고, 한국 곳곳을 누비는 여행자이기도 하다. 때로는 노동자이기도 하다. 다양한 위치를 가진 존재다. 우리와 하나가 되도록 여러 제약을 재검토해야 한다.”

유 총장이 말한 ‘칸막이 없애기’ 방안들은 서로 스며들며 하나가 돼 있는 것처럼 보인다. ▶표어 ▶LnL ▶첨단융합학부 ▶바이오메디컬 ▶외국인 학생과 교수 등은 소통과 공감, 감성과 에로스를 통해 서로 연결되고 합쳐져 혁신과 새로운 인재를 만든다는 말이다. 유 총장이 그리는 ‘융·복합’이다.

유 총장과의 인터뷰가 이뤄진 지난 11일, 총장실이 있는 행정관 앞 잔디 광장에는 학생들이 축제 준비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학교는 ‘소통 공간’으로 잔디 광장을 열어 놨다. 학생들은 그곳에서 공감과 협업을 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이 새 이름이 붙을 기숙사에서, 첨단융합학부에서, 한국형 보스턴바이오클러스터 등 곳곳에서 펼쳐질 것이다. 유 총장은 “소통은 잘 된 거지요?”라며 인터뷰를 마쳤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