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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부인 대신 여고생 박근혜 방일, '해운 한국' 첫걸음 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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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8호 14면

신동식, 수출 한국의 길을 열다 ⑤ 파란만장 청와대 시절

이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신동식 회장이 1968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 걸프오일 경영진을 만난 결과 걸프에서 발주한 30만t급 유조선 4척을 무상으로 받아냈다. 당시 5만~6만t급 유조선을 주로 운영하던 걸프에서 동아시아 지역의 원유 수송량이 늘어날 것을 예상하고 일본에 발주한 초대형 유조선이었다. 이듬해 명명식을 앞두고 일본 정부와 걸프오일로부터 “영부인이 일본을 방문해 인수해갔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국교 정상화 초기 한일 양국간 우호 관계를 다지려는 일본 정부의 의도와 이왕 유조선을 제공하는 김에 한국 정부의 호의를 재확인하려는 걸프 측의 속내가 일치한 결과였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의 아픈 기억이 아직 지워지지 않은 상황에서 ‘퍼스트 레이디’가 일본을 방문하기는 쉽지 않았다. 대신 대통령의 영애인 박근혜 양이 일본을 방문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다.

박근혜가 ‘아저씨’라 부르며 잘 따라

1969년 6월 유조선 명명식 참석차 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한 대통령 영애 박근혜(사진 왼쪽)양과 신동식(왼쪽에서 둘째) 회장. [사진 신동식]

1969년 6월 유조선 명명식 참석차 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한 대통령 영애 박근혜(사진 왼쪽)양과 신동식(왼쪽에서 둘째) 회장. [사진 신동식]

“당시 청와대에는 1층에 집무실, 2층에 관저가 있었지요. 하루는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1층으로 내려오시며 ‘아직 고등학생인 근혜가 해외에서 실수라도 하면 어쩌냐’고 걱정을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잘 돌보고, 외삼촌인 육인수 의원의 동갑내기 딸과 함께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설득했지요. 결국 육 여사 대신 근혜 양이 명명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어요.”

군인 출신 정치인과 관료가 대부분이던 당시 청와대에서 젊고 해외 경험이 많은 민간 출신 전문가인 신 회장은 독특한 캐릭터였다. 덕분에 박 대통령 가족과 편하게 지냈다. 박근혜 양이 “아저씨”라 부르며 따랐을 정도였다. 69년 6월 신 회장은 명명식 참석을 위해 박근혜 양과 도쿄로 출발했다. 선박 건조 후 최초로 물에 띄울때 주빈이 이름을 붙이고 배를 묶은 밧줄을 도끼로 자른다. 19세기 초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이후 주빈은 여성이 맡는 것이 관례다. 명명식 후에는 인도 서류에 서명해 소유권이 선주에게 넘어간다.

도쿄에 도착한 신 회장은 엄민영 주일대사의 부인에게 명명식 준비를 부탁했다. 긴자를 방문해 구두와 옷을 사서 단장하고, 미용실에서 머리와 화장을 했다. 신 회장이 “굽이 있는 구두를 처음 신어본다는 근혜 양에게 명명식에서 영어 연설까지 맡기려니 내심 걱정이 됐다”고 말했다. 숙소인 오쿠라 호텔에는 일본 경시청이 특별 경비본부를 세우고 삼엄한 경계 태세를 유지했다. 조총련에서 공격할 수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6월 21일 미쓰비시 중공업 요코하마 조선소에서 열린 유조선 ‘유니버스 코리아’ 명명식은 큰 문제 없이 마무리됐다. 박근혜 양은 짧은 영어 연설을 모두 외워서 무난히 진행했다. 작은 배조차 없던 우리나라가 대형 유조선단을 운용하게 된 순간이었다.

“자칫 영부인 방일을 둘러싼 갈등으로 번질뻔한 일이 ‘해운 한국’의 초석을 세우는 계기가 된 셈이지요. 명명식 후 근혜 양은 소니 박물관에서 휴대용 라디오와 막 개발한 컬러 TV 같은 최첨단 전자기기를 관람했어요. 그때 받은 인상이 깊었는지 대학 진학할 때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선택하더군. 44년 뒤인 2013년 8월 박근혜 대통령이 한국 해군 잠수함 김좌진함 명명식에 참석했어요.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직접 밧줄을 자른 것은 처음이라고 기사가 났지요.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생애 두번째 명명식인 셈이지요.”

신 회장의 청와대 생활은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숨가쁘게 돌아갔다. 바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일이 터져서 전쟁을 치르듯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실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68년 1월 21일 일요일 오후, 당직 비서관으로 청와대를 지키던 신 회장은 총성과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에 크게 놀랐다. 난데없이 청와대 코앞에서 총격전이 벌어지자 경호실과 수도경비사령부에 비상연락을 했지만, 총격전이 벌어진 장소와 이유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이틀 전 북한 무장 침투조와 우연히 마주친 나무꾼 형제의 신고로 군이 비상 대응에 나선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요일 오전 “전방부터 서울 외곽까지 수십 겹의 방어선을 치고 순조롭게 공비들을 소탕하고 있다”는 국방부 장관의 보고에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있었다.

경호실장, 국방장관, 내무장관, 보안사령관, 수도경비사령관에게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한 시간 이상 닿지 않았다. 오후 늦게야 책임자들이 한명씩 청와대에 나타났다. 뒤늦게 나타난 이들을 보자 원망과 안도감이 몰려왔다. 신 회장은 “당신 뭐 하는 사람이요? 지금 사태가 어찌 돌아가는지 알기나 합니까?”라고 호통을 쳤다. 훗날 “미국물 먹고 오더니 육군 대장들한테도 무서운 줄 모르고 큰소리를 치더라”는 악명을 얻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사태가 어느 정도 수습되면서 청와대를 나섰다. 통행금지령이 내려진 서울에는 군 작전 차량과 특수지 근무 차량만 드문드문 다니고 있었다. 요소요소를 지키는 헌병과 경찰은 ‘수상한 자는 신분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살해도 좋다’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

한일·한중 열차 페리, 박근혜 대선 공약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 [중앙포토]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 [중앙포토]

1·21 사태는 청와대를 기습하려던 31명의 북한 침투조가 세검정에서 정체가 발각되자 시가전을 벌인 것이다. 이들 중 29명이 사살되고 1명은 투항했다. 우리도 민간인 7명을 포함해 32명이 숨지는 피해를 입었다. 신 회장은 “청와대에서 300m 떨어진 자하문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며 “이들이 북악산을 타고 공격했다면 대통령이 어이없이 당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경기도 양주에서 서울 우이동을 잇는 ‘김신조 루트’는 41년간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묶였다. 예비군과 주민등록제 역시 이 사건을 계기로 도입했다.

이 사건은 신 회장에게 개인적인 아픔도 남겼다. 자하문 초소에서 “특수훈련을 끝내고 돌아가는 방첩부대(CIC) 소속”이라고 버티던 북한 무장공비를 막아섰던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이 가슴에 총을 맞고 현장에서 숨을 거뒀다. 최 서장은 신 회장과 춘천고등학교 동창으로 어릴 때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나중에 ‘최구식 경무관 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을 맡아 동상을 세우고 일대기를 조명한 『한알의 밀알이 되어』를 냈다. 신 회장은 “지금도 자하문 앞 최 서장의 동상 앞을 지날 때마다 친구의 희생정신과 당시의 아찔한 순간이 다시 떠오른다”고 말했다.

71년 공직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해사기술 대표 등으로 민간 조선산업 분야에서 활약하던 신 회장은 79년 10월 27일 오전 4시에 가까이 지내던 신문기자의 전화를 받았다. 청와대에 변고가 나서 박 대통령이 사망한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부랴부랴 어두운 길을 달렸다. 문득 5년 전 육 여사가 세상을 떠난 날이 생각났다. 미국 출장길에 뉴욕 호텔에서 TV를 보다가 비보를 접했다. 장례식이 끝난 후에야 귀국해 묘를 참배한 일이 생생한데 비극이 되풀이되는 상황에 기가 막혔다.

2013년 8월 13일 한국 해군 잠수함 김좌진함 명명식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 [중앙포토]

2013년 8월 13일 한국 해군 잠수함 김좌진함 명명식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 [중앙포토]

청와대에 도착해 길을 막는 헌병 장교에게 신분을 밝히니 뜻밖에 문을 열어줬다. 본관에 들어서니 낯익은 경호관이 달려 나와 손을 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대통령, 경호실장, 경호처장이 모두 죽고 명령을 내릴 사람도, 지켜야 할 사람도 없어진 공백 상태였다. 청와대 소속이 아니기에 지휘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빈소 준비를 도왔다. 시신도 없이 사진과 꽃만 겨우 준비한 엉성한 빈소를 마련하자 소복 차림의 박근혜가 내려왔다. 부모를 모두 잃은 모습에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얼싸안고 오열했다. 이 모습이 우연히 카메라에 잡혀 신문에 보도됐다. 그런데 반응이 이상했다. 정·재계 거물들이 잇따라 전화를 걸어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왜 쓸모없어진 사람을 붙들고 우느냐”고 다그쳤다. 박 대통령의 신임을 받고, 혜택을 본 사람일수록 더 매몰차게 돌아섰다. 이후 치열한 권력다툼을 지켜보면서 신 회장은 정치인들에게 깊은 실망과 환멸을 느꼈다.

“원래 골프를 좋아했는데 한동안 끊었어요. 그 사람들과 같이 밥 먹고 목욕탕에 들어가기 싫어서. 마지막으로 박 대통령과 대화한 것이 73년 옥포조선소 착공식 때입니다. 당시 조선공사 해외담당사장이던 제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훌륭한 일을 시작했으니 잘해달라’고 격려했지요. 내 기억 속의 박 대통령은 희망과 신념을 가득 담고 미소 짓는 모습이었는데….”

이후 박근혜와의 특별한 접점은 없었다. 신 회장은 98년 한일터널, 한중터널을 통해 암스테르담까지 철도를 연결하는 구상을 내놓았다. 당장 터널 건설이 어려우면 한일·한중 열차 페리를 통한 물류 혁신 방안을 제안했다. 박근혜 캠프에서 이 구상을 접했는지 박 후보가 대련~천진 열차 페리를 타보고 공약으로 내놨다. 대통령에 당선된 후 2014년 편지를 보냈더니 비서실을 통해 경제수석과 국토교통부 장관 면담 일정을 잡아줬다. 아쉽게도 열차 페리에 큰 열정은 없었는지 적극적으로 추진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계속〉

 한국전쟁의 폐허에 갇혀 있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세계 10위의 경제력을 갖춘 선진국으로 일어서기까지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일등공신들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선입국 의지를 실천에 옮겨 한국을 세계 제1의 조선 국가로 만든 신동식  ㈜한국해사기술 (KOMAC) 회장도 그 반열에 들 인물이다. 신 회장에게는 ‘조선업의 아버지’란 수식어 외에도 국가건설기획자 (nation building architect) 라는 별명이 붙어있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대한민국 초대 경제수석에 임명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참여하고, 과학기술 발전 계획을 수립 집행하여 한국기술연구원(KIST) 설립과 대덕연구단지 조성 등 경제발전의 기반을 닦았기 때문이다. 중앙SUNDAY는 한국 경제사의 산 증인을 인터뷰해 묻혔거나 잊힌 비화를 발굴하고 교훈을 탐색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92세인 지금까지 경영 일선을 지키며 새로운 기술과 미래 먹거리 창출에 도전하고 있는 현역 최고령 조선인 신동식 회장이 구술한 한국 경제의 발전사를 들어본다.

※정리: 김창우 기자

신동식 회장을 제외한 인물은 언급한 일이 벌어진 당시의 직함을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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