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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걸려도 과학기술 토양 다져야" 박정희 설득, KIST 세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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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9호 14면

신동식, 수출 한국의 길을 열다 ⑥ 과학기술연구원 설립

1969년 10월 23일 KIST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 KIST는 한국 과학기술 발전의 초석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진 신동식]

1969년 10월 23일 KIST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 KIST는 한국 과학기술 발전의 초석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진 신동식]

1966년 10월 초, 청와대 비서실에 소동이 벌어졌다. 3주 후 한국을 방문하는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깜짝 선물’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65년부터 시작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규모를 4만명으로 늘리는 것을 포함한 까다로운 협상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자 존슨 대통령이 “원하는 것 한 가지를 추가로 지원해주겠다”고 통 크게 인심을 쓴 것이다. 무엇을 요청할지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여의도에 존슨 타워를 세우자’ ‘한강에 존슨 브릿지를 놓자’는 등 대부분 빌딩이나 교량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원했다. 당시 경제수석이던 신동식 회장은 “기초과학 기술의 토대가 될 연구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당장 “과학자 데려다 연구 시켜서 어느 세월에 실용화하고 산업을 키우겠나”는 반대가 쏟아졌다. 하지만 회의를 주재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유를 물었다. 신 회장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돈을 빌리고 기술을 도입했지만, 이대로 그들의 손발 노릇만 하면 우리 손에 남는 것이 없다”며 “100년이 걸리더라도 과학 기술의 토양을 다져야 할 때”라고 설득했다. 박 대통령은 “과학기술연구소를 세우자”고 용단을 내렸다.

미 존슨 대통령, 66년 한국 추가 지원

1969년 오하이오 바텔연구소에 모인 재미 과학기술인들. 적지 않은 이들이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해 달라”는 박정희 정부의 설득에 응해 미국에서의 보장된 삶을 박차고 귀국했다. [사진 신동식]

1969년 오하이오 바텔연구소에 모인 재미 과학기술인들. 적지 않은 이들이 “조국 근대화에 이바지해 달라”는 박정희 정부의 설득에 응해 미국에서의 보장된 삶을 박차고 귀국했다. [사진 신동식]

“존슨 대통령 방한까지 시간이 없었어요. 박 대통령과 지프차를 타고 연구소를 쓸만한 땅을 찾아 서울 근교와 경기도 일대를 헤집고 다녔지요.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어느 토요일 청량리 근처를 지나는데 나무가 우거진 곳이 눈에 들어왔어요. 대통령도 마음에 들었는지 ‘가 보자’고 하시더군요. 도착해보니 임업시험장(현 국립삼림과학원)이었어요. 경비가 ‘못들어간다’고 제지하다가 뒷좌석에 탄 대통령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문을 열어주던 생각이 납니다. 임학과 교수들은 ‘몇십년 걸려 키운 숲을 다 뺏긴다’고 읍소하는데 박 대통령이 ‘최대한 숲을 살려서 건물을 세우겠다’고 설득했지요. 이렇게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자리가 정해졌어요.”

연구소 부지는 구했지만 들어올 과학자가 없었다. 해외에 있는 고급 두뇌를 모셔오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유타대에서 교수로 있던 저명한 화학자 이태규 박사와 미국과 캐나다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최형섭 박사 등이 발벗고 나섰다. 포드재단에서 2만9000달러, 바텔기념연구소에서 9000달러를 지원받아 순회설명회를 열었다. 오하이오주 컬럼비아의 바텔연구소 열린 설명회에는 수백명의 재미과학자가 모였다. 신 회장은 박 대통령의 의지와 지원 방안을 설명하며 귀국을 호소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67년 ‘기술 혁신’, 69년 ‘생활의 과학화’를 신년 휘호로 냈을 만큼 이 무렵 과학기술 진흥에 관심이 컸다. 다행히도 30여명의 인재들이 미국에서의 안락한 생활과 보장된 지위를 버리고 선뜻 한국행에 응했다. 이후 미국과 유럽, 일본에서 이어진 설명회를 통해 100여명의 과학자를 서울에 모을 수 있었다. 69년 연구소가 완공되면서 KIST는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연구소로 발돋움했다. 초대 원장을 맡았던 최형섭 박사는 71년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자리를 옮겨 최장수 장관(7년 6개월 재임) 기록을 세웠다. KIST 중앙 강당은 ‘존슨 강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KIST 설립은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의 중요한 이정표가 됐습니다. 독일분원, ‘한·베 과학기술연구원’(VKIST)을 포함해 박사급 연구원만 2800명, 73년 조성에 들어간 대덕연구개발특구까지 합치면 수만명에 달하는 인재들이 모여 연구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KIST 내 인력양성을 위해 설립한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비롯해 대부분의 과학기술분야 정부출연연구소들은 KIST의 부설기관이나 연구 파트가 성장해 분리되는 형식으로 만들어졌지요. 해외에서도 효과적인 개발도상국의 연구 역량 강화 방안으로 관심이 큽니다. 다음달에는 대덕 50년 기념 행사를 대규모로 열 계획입니다.”

박정희 정부는 남미나 아시아의 독재국가와는 좀 결이 달랐다. 군사 쿠테타로 집권했지만 신 회장 같은 유능한 전문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를 발탁해 힘을 실어줬다. 이 전문가 그룹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새마을운동을 기획하고 실천했다.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생색만 내려는 계획이 아니었다. 통치권자 개인이나 가족, 친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60년대 초대 경제수석으로 이 과정에 참여한 신 회장은 “행정부 장관이나 청와대 비서관, 군인 출신이나 민간인 출신 할것 없이 ‘이 나라가 잘 된다면 나 하나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일했다”고 회상했다. KIST 설립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누군가 아이디어를 내면 다른 사람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반대하기 일쑤였다. 논리를 세우고 근거를 마련해 반대파를 설득하는 작업은 일상다반사였다.

KIST 내에 박 대통령 동상·존슨 강당

서울 하월곡동 KIST 안에 위치한 박정희 대통령 동상을 찾은 신동식 회장. [사진 신동식]

서울 하월곡동 KIST 안에 위치한 박정희 대통령 동상을 찾은 신동식 회장. [사진 신동식]

민간 출신 테크노크라트들이 청사진을 내놓으면, 군인 출신 공직자와 정치인들이 현실화하는 것이 당시에는 일반적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그 결과를 평가하는데 능했다. 그저 “잘 했다”고 자화자찬하는데 그치치 않고, 꼭 제삼자의 검토를 거쳤다. 대표적인 싱크탱크가 평가 교수단이다. 박 대통령이 직접 “정치 성향을 막론하고 전문가들을 모으라”고 지시했다. 교수단은 한달에 한번씩 중앙청 회의실서 칼국수를 먹으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냈다. 청와대 비서실에서 대통령 지시사항과 진행상황, 평가를 취합해 공개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로 있던 남덕우 부총리가 교수단 회의 출신 스타였다. 남 부총리는 69년 재무부 장관을 거쳐 74년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에 임명돼 4년간 재직하며 70년대 한국 경제를 이끌었다. 남 부총리는 “박 대통령이 재무부 장관 임명장을 주면서 ‘남 교수, 그동안 정부가 하는 일에 비판을 많이 하던데 이제 맛 좀 봐’라고 말을 건넸다”며 “내 딴에는 정부 시책에 온건하고 건설적인 비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고 회고했다. 신 회장은 탁상공론보다 현실적인 대안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한국 경제 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매달 경제동향보고를 직접 챙겼어요. 그래서 장관들이 참여하는 경제정책회의가 끝나면 수석비서관회의를 열어서 보고 내용을 정리했지요. 그냥 숫자만 확인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안되면 왜 안됐냐를 따졌어요. 수출 확대에 제동이 걸릴 경우 돈이 문제라면 은행과 협의하고, 규제 때문이라면 관계부처와 개선책을 논의했지요. 이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지시와 다른 결론이 나와도 박 대통령을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신 회장은 “4000만명이 먹고 살려면 제조업밖에 없다, 제조업을 하려면 국내가 아니라 세계를 대상으로 시장을 개척해야 한다”는 신념을 굽힌 적이 없다. 그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몽상이었지만 ‘수출 한국’의 가능성을 믿는 리더가 있고, 구체적인 청사진을 마련할 관료가 있고, 현장에서 뛰는 기업인이 있었기에 꿈을 현실로 이뤄낼 수 있었다. 2010년 서울대로부터 ‘자랑스러운 동문상’을 받은 신 회장은 후배들 앞에서 “대한민국의 초대 경제수석이 상대가 아니라 공대 출신이었기에 이렇게 성공했다”고 연설했다. 스스로의 얼굴에 금칠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60년대, 70년대에 전세계에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어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한강의 기적’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양철조각 하나 못 만들던 나라가 30만t 배를 만들고, 최근에는 대만까지 무인운전선박 시험운행에 성공했어요. 우리나라가 2003년 처음으로 조선 건조량, 수주량, 수주잔량 모두 세계 1위를 달성하면서 국내외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박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려웠을 일이지요. 상장을 들고 동작동 현충원에 찾아가 ‘대장님이 그리도 원하시던 미래, 오늘 조선이 세계 1위 하는데 제가 요만큼이라도 기여했습니다’라고 보고했어요. 개인적인 유대감도 있지만 나라 발전을 놓고 볼 때 국가원수로서 높이 평가해야 될 부분이 너무나 많아. 내가 그분을 못 만났더라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도 없고 또 어떻게 보면 오늘날에 한국 과학기술이나 조선 산업이 이렇게까지 될 수가 있었을까 싶어요.”

신 회장은 박정희 기념관에 동상 하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서울 시내에는 유일하게 KIST 안에 있다. 국가주요시설이라 일반인은 들어가지 못한다. 신 회장은 최근 KIST를 방문해 박 대통령 동상의 손을 잡았다.

“동상에 손이 닿으면 차가워야 되잖아. 그런데 내게는 따뜻하게 느껴졌어요. 베토벤이 운명 교향곡 같은 불후의 명작을 남긴 데는 후원한 귀족들, 악보를 멋지게 연주한 음악가들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지요. 마찬가지로 대통령이 초석을 다졌기에 조선, 전자를 키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박 대통령이 목표를 정하면 신동식이 작곡하고, 정주영·이병철 회장이 연주하는 삼박자가 잘 맞았던 덕이지요. 장기집권, 인권 문제나 소위 ‘떡고물’을 챙겼다는 측근들의 부패 등 정치적인 과오가 없지는 않겠지만 먹을 것, 입을 것조차 부족했던 당시 상황에서 국가의 미래 좌표를 정하고 추진한 박 대통령의 공로는 재조명이 필요합니다.”  〈계속〉

※정리: 김창우 기자

신동식 1932년생.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졸업. 박정희 정부에서 대통령 정무비서관, 초대경제수석 비서관, 대통령 직속 해사행정특별심의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은탑산업훈장, 대통령 표창 등을 받았다. 현재 한국해사기술 회장, 카본코리아 회장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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