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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공업으론 경제 발전 힘들다" 조선·유화·반도체 밀어붙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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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7호 15면

신동식, 수출 한국의 길을 열다 ④ 전자·중화학공업 육성

1969년 대륙붕 자원개발협약 체결을 위해 방한한 걸프 오일 경영진과 만난 김정렴 상공부 장관(왼쪽 둘째)과 신동식 경제수석(왼쪽 셋째). [사진 신동식]

1969년 대륙붕 자원개발협약 체결을 위해 방한한 걸프 오일 경영진과 만난 김정렴 상공부 장관(왼쪽 둘째)과 신동식 경제수석(왼쪽 셋째). [사진 신동식]

1965년 귀국한 신동식 회장은 청와대 비서실 정무비서관(1급)을 거쳐 이듬해 경제수석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조국 근대화’는 멀기만 했다. 가발용으로 머리카락을 잘라 파는 것이 수출의 큰 부분을 차지했고, 일본에 수출하는 도미나 광어회를 먹으면 처벌하는 시절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국내외 전문가들은 경공업 중심의 수입대체산업 육성을 권고했다. 신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런 방식으로는 한국 경제 재건이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역발상을 했지요. 조선 분야는 유럽과 미국 등 조선 선진국들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추가 투자를 하지 않아서 조선소 독(dock)의 규모가 작았어요. 우리나라가 처음부터 초대형 독을 만들면 경쟁력 확보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석유화학은 공해산업이라는 인식 때문에 미국 뉴저지, 캘리포니아에서 밀려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국제 정세를 고려할때 미래 지향적인 틈새를 찾으면 어쩌면 우리도 성공할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일종의 도박이었지만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아니겠어요.”

고심 끝에 만든 보고서를 들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던 박정희 대통령을 찾았다. 사범학교 출신에 사관학교를 나온 박 대통령은 대충 훑어보거나 검토해보겠다며 시간을 끄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계획이 성공하면 2단계, 3단계로 추진할 사항은 무엇인지 꼼꼼히 챙겼다. 박 대통령은 “나보다 더 많이 공부했고, 더 많이 아는 당신이 연구 검토한 결과라면 타당한 근거가 있을 것”이라며 “국익을 위해서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늘 그 하나만을 기준으로 삼아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여보, 내가 뭘 해주면 되겠어?”라고 반문했다. 신 회장은 “걸프오일 회장에게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했다. ‘신동식은 대통령을 대신하는 사람이니 믿고 일을 추진해달라’는 일종의 신임장이었다. 1968년 4월 이 편지 한장을 들고 윌리엄 화이트포드 걸프오일 회장을 만나러 갔다.

경제수석 때 365일 중 200일 넘게 외국 다녀

이병철 삼성 회장의 ‘전자공업 ’ 칼럼이 실린 1969년 6월 26일자 중앙일보 1면. [중앙포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전자공업 ’ 칼럼이 실린 1969년 6월 26일자 중앙일보 1면. [중앙포토]

우리나라는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원유를 정제할 정유공장이 없어 휘발유와 등유를 수입하는 처지였다. 중장기적인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적지 않은 자본과 기술을 투입해 정유공장을 짓고, 최소한 10~20년 동안 안정적으로 원유를 공급해 줄 파트너가 필요했다. 이런 힘을 가진 곳은 걸프, 엑손 모빌, BP, 쉘 등 메이저 오일 컴퍼니밖에 없었다. 이 가운데 걸프는 63년 대한석유공사(유공, 현 SK이노베이션) 지분 일부를 인수하는 제휴를 맺고, 나중에 7광구 대륙붕 개발에도 참여하는 등 한국에 관심이 컸다. 화이트포드 회장은 “걸프에서 채굴한 원유를, 걸프 공장에서 정유해, 걸프 배로 실어나른 뒤 한국에 판매만 하는 것은 너무 일방적으로 걸프에만 유리한 거래가 아닌가”라는 신 회장의 설득에 귀를 기울여줬다. 결국 걸프에서 발주한 30만t급 유조선 4척을 무상으로 인수해, 돈도 없고 기술도 없는 상황에서 막대한 양의 원유 수송이 가능하게 된 기적같은 결과를 얻어냈다.

전자와 반도체 산업 진흥에 나선 것도 이맘때다. 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반도체라는 말 자체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미국 반도체 육성위원회 자문을 맡고 있던 김완희 컬럼비아대 교수가 이 분야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67년 경제수석이던 신 회장은 컬럼비아대로 찾아가 김 교수로부터 “앞으로 세상은 반도체가 좌우할 것”이라는 조언을 들었다.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니 “믿을 수 있는 사람이냐”며 귀국을 요청했다. 그해 9월 서울에 도착한 김 교수를 그날 저녁 청와대로 안내했다.

“해외에 오래 머물러서인지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도 그다지 격식을 찾지 않았어요. 밤새도록 박 대통령과 이야기꽃을 피우더니 다음날 대통령 집무실에 한국 전자공업을 육성할 방안을 담은 건의서를 가져왔어요. 이를 바탕으로 1년 후 김 박사는 ‘어떻게든 선진 기술을 도입해 수출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냈고, 다음날 박 대통령은 이를 바탕으로 한 ‘전자공업 진흥 5개년 계획’을 재가했어요.”

박 대통령은 부서 간의 권한 다툼을 우려해 전자공업진흥회를 만들고 김 교수에게 전권을 줬다. 재계 인사들을 설득하는 것은 신 회장의 몫이었다. 58년 구인회 락희화학 사장이 창업해 66년 국내 최초로 흑백 TV를 만든 금성사, 나중에 가전 부문을 대우전자로 넘긴 대한전선, 이병철 회장이 전자산업 진출을 모색하던 삼성 등에 반도체 투자를 권유했다. 모두 난색을 보이는 것을 “대통령의 지시”라고 밀어붙였다. 일본 재계에 지인이 많던 이병철 회장이 상황을 파악해 보더니 “어이쿠, 이건 해야겠다”며 69년 삼성전자를 창업했다.

1968년 ‘대형 유조선단 확충 대책 ’ 보고서.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좋은 착상이니 적극 추진하라”는 지시를 남겼다. [사진 신동식]

1968년 ‘대형 유조선단 확충 대책 ’ 보고서.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좋은 착상이니 적극 추진하라”는 지시를 남겼다. [사진 신동식]

70년대 이후 전자산업은 성장의 날개를 달았다. 74년 아남산업이 일본 내쇼날과 합작해 만든 한국내쇼날이 컬러TV를 국내 처음 생산해 수출하기 시작했다. 77년 삼성과 금성도 컬러TV 생산대열에 합류했다. 74년 미국 업체와 합작으로 한국반도체가 닻을 올리면서 반도체 칩 생산도 시작했다. 한국반도체는 적자를 이기지 못하고 삼성그룹에 인수되며 삼성반도체로 새로 태어났고, 80년에는 삼성전자가 흡수합병해 오늘날에 이르게 된다. 1962년 불과 50만달러던 우리나라의 전자 수출은 72년 1억달러, 76년 10억달러를 넘어섰다. 그렇게 우리나라의 반도체 신화가 시작됐다.

조선소 건설에도 박차를 가했다. 헬리콥터를 타고 전국을 누빈 끝에 점찍은 부지가 거제도였다. 수심이 깊은 데다 태풍이 자주 오는 길목에서도 벗어난 천혜의 환경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한산도에 통제영을 세운 이순신 장군이 수군 기지로 활용했던 옥포에 대한조선공사(현 한화오션) 조선소를 짓기로 결정했다. 69년이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독이 길이 300m, 폭 50m 였어요. 그 정도는 돼야 250m를 넘나드는 30만t급 유조선을 만들 수 있었거든. 옥포도 처음에는 그 정도 규모로 설계도를 가져왔더라고. 그래서 ‘길이 600m, 폭 150m는 돼야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밀어붙였지.”

옥포조선소, 한때 ‘세계 최대 독’ 기네스북에

옥포조선소 제1 독은 길이 530m, 폭 135m 규모에 한번에 1000t 이상을 들어올릴 수 있는 독일 크루프산 초대형 골리앗 크레인이 설치됐다. 73년 완공한 이 독은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79년, 640m), 현대중공업(현 HD현대) 울산조선소(82년, 642m), 군산조선소(2008년, 700m) 등이 차례로 기록을 경신했지만 한때 세계 최대 단일 독으로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신 회장은 “원래 옥포 외에도 지세포에 삼성, 장승포에 현대 조선소를 추가할 계획이었는데 삼성은 지세포 대신 장평동에 자리잡았고, 현대는 울산으로 갔다”고 말했다.

71년 청와대를 나와 대한조선공사의 해외사업담당 사장으로 옮긴 신 회장은 세계를 누비며 세일즈에 나섰다. 하지만 조선소 완공과 제1차 오일쇼크가 겹치는 불운이 찾아왔다. 애초부터 신 회장의 초대형 독 계획에 회의적이던 관료와 전문가들의 비판이 쏟아졌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비아냥은 양반이고, ‘죽일 ×’이나 ‘매국노’라는 험한 소리를 듣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런 조롱은 몇 년 후 글로벌 경기 회복으로 본격적인 수주가 시작된 후에야 사라졌다.

옥포조선소는 척당 1억2000만달러짜리인 30만t급 유조선을 한꺼번에 4척씩 건조할 수 있다. 10척 주문만 받으면 20%인 계약금만 2억4000만달러에 달한다. 70년에야 수출액 10억달러를 넘어선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70년대 중후반에는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의 가장 큰 업무 중 하나가 조선 수주와 계약금, 중도금, 잔금 입금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신 회장은 “굴곡이 많았지만 조선소를 지으면서 중간재 공급업체만 국내에 700여개가 생겼고, 금융·보험·해운 등 연관산업도 성장했다”며 “대덕연구단지 최초의 국책 연구기관인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와 36개 대학의 조선학과 등 고급인력 양성에도 큰 역할을 한 셈”이라고 말했다.

“팔자에 없는 경제수석 노릇을 하느라 일년 365일 중 200일 이상을 외국에 다니면서 돈 꾸고, 기술 꾸고, 원료 꾸고 그랬어요. 외국 나가기도 쉽지 않은 시설이라 남들이 보면 비행기 타고 해외유람 다닌다고 했지. 그런데 정말 문전박대 많이 당했어요. 대한민국 대표 거지 노릇하고 다닌 셈인데. 돌이켜보면 나라 운도 좋았고, 박정희 대통령 운도 좋았고, 내 정성이 통해서 동냥처럼 얻어 온 수백 건의 외자가 비료공장·정유공장이 되고, 제철소·조선소가 됐던 거지. 그게 오늘날 한국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하면 뿌듯해요.” 〈계속〉

 한국전쟁의 폐허에 갇혀 있던 대한민국이 오늘날 세계 10위의 경제력을 갖춘 선진국으로 일어서기까지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할 일등공신들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조선입국 의지를 실천에 옮겨 한국을 세계 제1의 조선 국가로 만든 신동식  ㈜한국해사기술 (KOMAC) 회장도 그 반열에 들 인물이다. 신 회장에게는 ‘조선업의 아버지’란 수식어 외에도 국가건설기획자 (nation building architect) 라는 별명이 붙어있다. 엔지니어 출신으로 대한민국 초대 경제수석에 임명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참여하고, 과학기술 발전 계획을 수립 집행하여 한국기술연구원(KIST) 설립과 대덕연구단지 조성 등 경제발전의 기반을 닦았기 때문이다. 중앙SUNDAY는 한국 경제사의 산 증인을 인터뷰해 묻혔거나 잊힌 비화를 발굴하고 교훈을 탐색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92세인 지금까지 경영 일선을 지키며 새로운 기술과 미래 먹거리 창출에 도전하고 있는 현역 최고령 조선인 신동식 회장이 구술한 한국 경제의 발전사를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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