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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거리 질주 '쇳덩어리 악마'…"사람들 짐 내던지고 도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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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8호 27면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1909년 자동차 출현

1909년 이른 봄, 무게가 거의 3톤에 달하는 거대한 쇳덩어리가 포효하며 서울의 거리를 질주했다. 그 정체는 바로 미국의 화이트 모터 컴퍼니(White Motor Company)가 제작한 30마력의 증기 자동차였다. 자동차가 대로를 따라 달려오자 사람들은 “짐을 내던지고 이 새로운 악마로부터 도망칠 수 있길 빌며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주인만큼이나 놀란 소와 말도 유일한 피난처인 근처의 상점과 가정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1914년 이용문, 한국인 첫 면허 취득

1909년 숭례문 앞에서 처음 보는 증기 자동차가 달려오자 혼비백산해 달아나는 조선 사람들과 소·돼지 등을 묘사한 『르 쁘띠 주르날』의 삽화. [사진 르 쁘띠 주르날]

1909년 숭례문 앞에서 처음 보는 증기 자동차가 달려오자 혼비백산해 달아나는 조선 사람들과 소·돼지 등을 묘사한 『르 쁘띠 주르날』의 삽화. [사진 르 쁘띠 주르날]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이었던 알프레드 마넘(Alfred W. Marnham)이 이 소동을 목격하고 남긴 감상이다. 그는 이 광경을 사진으로도 찍었지만 아쉽게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행히도 이를 바탕으로 그린 삽화가 영국의 『더 그래픽』 (The Graphic, 1909년 2월 20일)과 『르 쁘띠 주르날』(Le Petit Journal, 1909년 3월 7일) 일요판에 게재되어 그때의 모습을 짐작하는데 도움이 된다.

같은 사건을 묘사했지만 『더 그래픽』과 『르 쁘띠 주르날』의 논조는 사뭇 대조적이다. 『더 그래픽』은 조선인들이 느낀 놀라움을 담백하게 서술한 반면 『르 쁘띠 주르날』은 신기술에 대한 현지인들의 무지와 냉담함이 이러한 공포의 원인이라고 꼬집는다. 또한 삽화에서도 차이가 발견된다. 『르 쁘띠 주르날』에 실린 삽화에서는 남녀가 각각 두 명씩 자동차에 타고 있다. 이들의 태연한 표정과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한국인들의 모습이 기묘한 대조를 이룬다.

한국의 근대사에 천착하고 있는 로버트 네프(Robert D. Neff)의 연구에 따르면,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은 남자들은 각각 대한제국 황실의 수석 기술자였던 토마스 A. 코엔(Thomas A. Koen)과 그의 미국인 동료인 서울광산회사의 엔지니어 J. F. 매닝(J. F. Manning)이며, 뒷좌석에 스카프를 휘날리며 앉아 있는 두 명의 젊은 여성은 당시 주한 이탈리아 총영사였던 루이지 카사티의 딸이라고 한다.

같은 날에 이 사건을 목격한 어느 일본인 특파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조선인들은 인생에 남을 충격을 받았다. 이제 점차 익숙해지고 있지만, 자동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한국인들은 그들이 지은 많은 죄를 처벌하기 위해 낯설고 괴상한 악마가 이 땅을 찾아왔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정작 죄를 지은 사람은 코엔이었다. 그는 ‘낯설고 괴상한 악마’인 증기 자동차를 한국에 들여오면서 까다로운 수입 절차와 세금을 피하기 위해 이를 광산기계로 위장했던 것이다.

경성자동차상회에서 판매하던 자동차.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경성자동차상회에서 판매하던 자동차.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자동차 산업이 자생적으로 발달하지 않았던 아시아 지역, 특히 한·중·일 3국에서 자동차의 도입은 이처럼 외세나 당시의 왕족 혹은 귀족 계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중국의 경우 북양군벌의 수장인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서태후(西太后)의 환심을 사기 위해 청나라 말기인 1901년에 미국 최초의 가솔린 자동차인 두리에 서레이(Duryea Surrey)를 들여온 것이 최초라고 한다. 한반도에 들어온 최초의 자동차는 고종의 어차였다.

1902년에 조선의 대신들은 고종에게 신식 문물의 상징인 자동차를 타고 즉위 40주년 기념식인 칭경예식에 참여해 줄 것을 간청했다. 고종은 당시 어려웠던 나라 상황과 전염병 창궐 등을 이유로 처음에는 반대했다가 신하들의 강권에 밀려 마지못해 승낙했다고 한다. 어차(御車)의 수입은 고종의 주치의이자 주한 미국 공사였던 호레이스 알렌이 담당했다. 하지만 1903년에 열린 칭경예식에 고종은 어차를 타고 참석하지 못했다. 복잡한 수송 과정 덕분에 행사가 열리고 나서도 4개월 후에나 도착했기 때문이다.

왕족인 서태후와 고종이 직접 자동차를 관리하고 운전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자신의 자동차를 직접 유지하고 운전하는 현대적인 의미의 자동차 소유자는 아시아 지역에서 언제 등장했을까? 세계에서 최초로 자동차 산업이 발달했던 독일에는 ‘헤렌파러(Herrenfahrer)’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영어로는 ‘젠틀맨 드라이버(Gentleman Driver)’로 번역되는 이 ‘헤렌파러’라는 개념은 ‘신사 운전수’라는 뜻으로, 왕족이나 귀족처럼 마차나 자동차의 뒷좌석에 점잖게 앉아있기 보다는 직접 탈것을 관리하고 운전하는 ‘신세대’ 모험가를 일컫는 말이다. 밀수한 증기 자동차로 서울 시내를 공포에 빠뜨렸던 코엔 역시 이러한 ‘헤렌파러’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개벽』 제25호(1922년 7월 10일)에 게재된 글이 흥미를 끈다. ‘중국, 조선, 일본의 3국을 통틀어서 자동차를 제일 먼저 탄 사람이 누구일까? 자동차를 제일 먼저 탄 사람은 이번에 작고한 손병희 선생이라고 한다. 동양 3국 중에서 맨 처음으로 자동차를 구경한 데가 일본이고, 일본에서 가장 먼저 자동차를 점유한 사람이 바로 선생이었다. 일본의 메이지 36년경(1903년)에 선생께서 일본에 망명하였는데, 그때 오사카에 박람회가 열리며 어느 미국인이 자동차 2대를 출품하였다. 이를 본 선생은 곧 그 중의 1대를 매수하여 출품자로부터 운전법을 습득하여 상투 짜고 갓 쓰고 조선복 입은 그대로 자기가 운전하여 오사카 시내를 질주하였다. 그런데 손 선생은 자동차의 운전에 능할 뿐 아니라 자전거를 썩 잘 타는데 만일 자전거 경주를 한다면 엄복동을 압도할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당시 오사카 박람회의 나머지 자동차 1대는 일본 궁내성이 매입하였는데 외국인인 조선인에게 다른 1대가 선점되었다 하여 퍽 섭섭하게 생각하였다고.’

여기서 언급된 오사카 박람회는 바로 제5회 내국권업박람회(内国勧業博覧会)로서 사실상 아시아 최초의 만국박람회이자 일본에 처음으로 자동차가 소개된 행사이기도 하다. 이렇듯 아시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에서 한국인이 일본 황실보다 먼저 자동차를 구입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더구나 천도교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의 면모로 잘 알려진 손병희가 실은 동양 최초의 ‘헤렌파러’이자 전설적인 자전거 선수인 엄복동과 비교될 정도로 자전거에 능했다는 이야기는 자못 통쾌감까지 자아낸다.

1919년에 등록된 자동차 416대 달해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YMCA) 앞 거리를 달리던 자동차.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YMCA) 앞 거리를 달리던 자동차.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손병희가 1906년에 귀국하면서 그의 자동차도 가져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귀국 이후에도 ‘헤렌파러’로서 활발하게 자동차를 운행했던 것만큼은 사실이다. 같은 시기에 동양합동광업회사 감사였던 찰스 크리스핀은 한국에서의 자동차 운전은 거의 쓸모없는 일이라고 단언했다. 1910년 중반에 어느 한국인이 친구들과 함께 프랑스제 자동차로 서울의 거리를 질주하며 보행자와 동물들을 놀라게 하다가(마치 1년 전에 증기 자동차로 장안을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  넣었던 코엔처럼) 곧 고장을 일으켜 황소의 견인을 받아 집에 돌아가는 일이 벌어지자 크리스핀의 평가는 정확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의 선언은 곧 틀린 말이 되었다.

1906년 5월 15일자 황성신문이 권병수 등이 자동차 5대를 구매했다고 보도한 것을 시작으로 한반도 내의 자동차 수는 날로 급증하여 1919년에는 등록된 자동차가 총 416대였다. 1914년에는 이용문이라는 사람이 한국인 최초로 운전면허를 취득하였으며 1920년에는 최초의 여자 운전수인 최인선이 운전면허를 획득했다. 여성의 대외활동에 관대하지 않았던 당시 분위기를 고려했을 때 이용문의 면허 획득으로부터 6년 정도의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자동차의 수가 늘자 자연히 자동차 관련 사업도 확대되었다. 최초의 자동차 관련 제작업체인 조선와사전기(朝鮮瓦斯電氣)는 1910년에 설립되었고, 자전거와 자동차를 함께 취급한 조선자전차(朝鮮自轉車)는 초기 자동차사업과 자전거 간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동차운수업에서는 1917년 설립된 평남자동차상회(平南自動車商會)가 최초라고 할 수 있다.

1922년에는 조선인이 운영하는 자동차 정비 공장인 경성서비스가 세워졌다. 현대자동차의 창업주인 정주영은 원래 쌀장사를 하다가 1939년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쌀의 배급제가 실시되면서 장사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먹고 살 길을 찾던 정주영은 이 경성서비스에서 그의 트럭을 도맡아 수리하던 정비사인 이을학의 권유로 이곳저곳에서 돈을 끌어 모아 아도서비스라는 작은 정비공장을 인수하였고 이것이 바로 현재 글로벌 5위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 자동차 산업의 모태였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오태경 변호사(디자인 콜렉티브 ‘모임별’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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