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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깨비" "쇠당나귀"…경성 전차, 도쿄보다 4년 먼저 달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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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5호 26면

[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과학 문명 상징 전차의 등장

1899년 5월 17일 동대문에서 열린 전차 개통식 모습. 서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청량리까지 이어진 전차 노선은 서울의 경관과 일상을 송두리째 바꿨다.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1899년 5월 17일 동대문에서 열린 전차 개통식 모습. 서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청량리까지 이어진 전차 노선은 서울의 경관과 일상을 송두리째 바꿨다. [사진 서울생활사박물관]

1899년 5월 20일, 서울에서 전차가 최초로 운행했다. 사흘 전인 5월 17일에는 동대문에서 성대하게 전차 개통식이 열렸다. 서대문(경교)에서 종로를 거쳐 청량리까지 이어지는 전차 노선은 서울의 도시 경관과 일상생활을 송두리째 바꿨다.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속도로 빠르게 달리는 전차를 구경하기 위해 철로 주변마다 사람들이 북적였다. 전차 기점과 종점에는 어떻게든 전차를 타보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다. 당시로서는 비싼 운임이었던 전차타기에 혼을 뺏겨 가산을 탕진한 촌로가 생겼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우리나라의 근대화가 일본에 비해 뒤처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근대 과학 문명의 핵심인 전기와 전차의 도입만 보면 일본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다. 서울의 전차는 도쿄(1903년)보다 4년이나 앞서 운행을 개시했다. 물론 일본에서는 서울보다 먼저 교토(1895년)와 나고야(1898년)가 전차를 운행했지만, 당시 일본에서 온 군인이나 관리들에게도 전차는 매우 낯선 신식 문물이었다. 일본 군인들이 전차에 탑승하기 위해 조선인을 강제로 내리게 하고 자리를 몽땅 차지해 사회적 문제가 됐을 정도였다.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고종은 경운궁을 중심으로 제국의 격에 맞는 근대 도시로의 전환을 모색했다. 전차는 고종의 ‘광무(光武) 도시계획’ 일환으로 기획한 작품이었다. 고종은 한양 일대에 전기 공급이 원활하게 이뤄지길 원했다. 자연스레 부대사업으로 전기를 활용하는 전차 노선 부설을 함께 구상했다. 궁을 중심으로 한 종로 일대를 관통하는 전차 노선을 만드는 것은 민간에 전기를 보급하는 일이기도 했다.

운종가(雲從街)로 불리던 종로의 주요 지점마다 전신주를 설치하고, 서울을 동서방향으로 관통하는 전차 선로를 깔았다. 미국 자본으로 세운 한성전기회사에 사업권을 주고, 일본의 기술과 전문 인력을 동원해 사업을 진행했다. 즉, 전차 노선 부설과 운행은 근대 국가 출범을 선언한 고종 황제의 최초 정부주도 기간산업이자, 국책사업이기도 했다.

“상여 같은 전차 탓 불미스러운 일 생겨”

종로 화신백화점 앞을 지나는 213호 전차. [사진 서울역사박물관·한국사진사]

종로 화신백화점 앞을 지나는 213호 전차. [사진 서울역사박물관·한국사진사]

초기 전차 운행으로 새로운 문물을 마주한 사람들은 충격과 공포를 경험했다. 평균 시속 15㎞, 최고 시속 30㎞로 달리는 100마력의 40인승 전차는 당시 사람들에게 “철도깨비”, “쇠당나귀”로 불렸다. 당시 가마와 인력거가 주요 이동수단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전차의 속도와 규모가 얼마나 대단하게 느껴졌을지 짐작할 수 있다.

불행한 사고도 잇따라 발생했다. 전차 운행을 시작한 지 열흘째이던 날 종로 파고다공원 앞에서 구경하던 다섯 살 어린아이가 다가오던 전차에 치어 죽었다. 가뜩이나 전차 운행에 신경이 곤두섰던 사람들은 도끼와 몽둥이를 들고 전차를 쫓아갔다. 성난 군중이 전차에 올라타자 겁에 질린 운전수가 전차를 버리고 도망갔다. 화가 풀리지 않은 사람들은 전차를 부수고 불을 질렀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정부에서는 즉시 전차 운행을 중단했다. 이후 고종이 직접 사과하고, 유가족에게 배상금을 지급했다.

전차의 부설과 운행은 황실의 이해관계를 예민하게 반영한 사업이기도 했다. 고종은 자신의 아내인 명성황후가 묻힌 홍릉 행차에 발생하는 경비와 시간을 줄이기 위해 전차를 사용할 요량이었다. 전차 부설은 황실 재정을 몽땅 투자한 사업이었고, 미국과 일본의 이해관계도 감안해야 했기에 백성들은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황실전용 귀빈차 1대와 의례용 특별열차 1대, 그리고 일반승객용 열차 8대를 합쳐 모두 10대를 운행했다. 귀빈차와 특별차 운행을 핑계로 일반열차는 툭하면 시간이 변경되거나 연착되기 일쑤였다. 전차는 운임만 내면 누구나 탈 수 있었다. 그런데 초기에는 지체 높은 사람들과 고위관료들이 전차 좌석을 독차지하는 바람에 평민들이 함께 타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기기도 했다. 갑오개혁 이후 공식적으로 신분제를 철폐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동일한 공간에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마주 앉는 일은 어색했다. 그러니 평민들에게 전차 탑승은 그저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전차 운행을 둘러싼 불만은 야릇한 방식으로 터져 나왔다. 대한제국 시기 어수선한 국내정치 분위기와 외세의 야욕으로 빚어진 혼란도 모두 전차 탓으로 돌렸다. “상여 같이 생긴 전차가 종로 한복판을 매일 가로지르니 나라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는 식이었다. 게다가 전차 궤도 부설을 이유로 종로의 수많은 주민들이 터전을 잃으면서 직접적인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졌다. 정부에서는 재산 손실을 보상하겠다고 공표했지만, 이윤을 내야 했던 미국계 한성전기주식회사와 주민들 사이에 보상을 둘러싼 갈등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즉, 인명사고를 계기로 성난 군중이 전차에 불을 지르고, 발전소까지 습격하는 일이 벌어진 까닭은 누적된 민간의 불만과 분노가 극에 달해 벌어진 항의의 성격으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경성의 시공간, 전차를 통해 이어지다

성난 군중이 도끼로 찍고 불태워 파괴한 전차의 잔해를 한성전기회사의 미국인 직원들이 지켜 보고 있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한국사진사]

성난 군중이 도끼로 찍고 불태워 파괴한 전차의 잔해를 한성전기회사의 미국인 직원들이 지켜 보고 있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한국사진사]

1920~30년대 전차 운행은 안정기에 접어든다. 초기에는 정류소도 따로 없어, 전차를 타고 싶은 행인이 손을 들면 멈춰 태우고, 승객이 내려 달라 말하면 아무 곳에서나 정지해 내려주는 식이었다. 일제에 의한 지배가 시작되고 경성전기주식회사가 전차 운행을 맡게 됐다. 이후 20년 동안 노선을 꾸준히 늘리고, 각 거점마다 정류장도 많이 설치했다. 10대에 불과하던 운행 차량은 200대 이상으로 늘어났다. 체계적인 운행을 하고 시간도 엄수하면서 전차는 경성 주민들의 일상적 교통수단으로 자리 잡는다. 1930년 기준 남쪽으로는 마포와 용산, 북쪽으로는 효자동과 창경궁, 동쪽으로는 청량리와 왕십리, 서쪽으로는 서대문과 아현동까지 이어지는 선로가 마련됐다.

1940년에 이르러서는 경성 전역에 16개의 노선이 갖춰졌다. 노선이 아무리 많아져도 경성 전차의 중심무대는 여전히 종로 일대였다. 종로를 지나는 노선이 언제나 가장 많은 승객을 태웠고, 운행 횟수도 제일 많았다. 전차 노선도는 근대도시 종로의 혈관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차는 종로의 공간을 시간으로 측정 가능하게 만들었다. 가령 종로 일대의 싸전과 포목전 어느 한 곳을 물어보면, “전차를 타고 어디에서 내려 5분 동안 더 걸어가면 된다”거나 “광화문통에서 전차로 십 분이 걸린다”는 식으로 위치와 장소를 설명할 수 있게 됐다.

‘전차가 왔다. 사람들은 내리고 또 탔다. 구보는 잠깐 멍하니 그곳에 서 있었다. 그러나 자기와 더불어 그곳에 있던 온갖 사람들이 모두 저 차에 오른다 보았을 때, 그는 저 혼자 그곳에 남아 있는 것에, 외로움과 애닯음을 맛본다. 구보는, 움직이는 전차에 뛰어올랐다.’(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조선중앙일보, 1934.8.1~9.19)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주인공 ‘구보’의 동선은 종로의 전차 노선과 거의 일치한다. 늦은 아침 구보는 정처 없이 집을 나서 전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난다. 이윽고 밤이 되면 전차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아무런 목적 없이 전차에 올라타 어딘가를 다녀오는 구보야말로 1930년대 경성 주민의 무료하면서도 모던한 일상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대수로울 것도 별다를 것도 없지만, 1930년대 경성의 공간과 시간은 이렇듯 전차를 통해 ‘감각’으로 이어졌다.

전차는 단순히 탈 것의 의미를 뛰어넘어, 경성의 주민들에게 새로운 일상을 구성하게 하는 친숙한 대상이 됐다. 어디를 가기 위해 전차를 탄다기보다, 전차를 타야만 어디든지 갈 수 있게 된 셈이다. 전근대의 도시가 산과 강을 비롯해 성곽과 담장으로 안팎이 구분되었다면, 근대도시는 전차의 선로와 정거장의 배치가 도시를 구획하는 기준이 됐다. 정류장을 기점으로 근대적 상점과 식당이 들어서고, 철로 양옆으로는 버스와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가 생겼다. 1968년 운행이 종료될 때까지 전차는 서울의 가장 대표적인 교통수단으로 기능했다.

종로구청·종로문화재단·중앙SUNDAY 공동기획

강부원 근대문화연구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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