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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중국에 가까웠던 오키나와, 어떻게 일본 땅이 됐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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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대륙과 해양 충돌의 현장’ 류구(琉球) 열도

김기협 역사학자

김기협 역사학자

규슈(면적 3만6782㎢)와 타이완(3만5808㎢)은 세계에서 37번째, 39번째로 큰 섬이다. 두 섬 사이를 동북-서남으로 잇는 선을 따라 늘어서 있는 수백 개 섬이 류구(琉球) 열도다. 이 섬들의 면적을 모두 합하면 약 4642㎢다.

서로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타이완과 류구 중 대륙에서 가깝고 덩치도 큰 타이완보다 류구가 역사의 무대에 먼저 등장하고 더 화려한 배역을 맡은 사실이 일견 뜻밖이다. 류구의 존재는 7세기 초에 중국과 일본 양쪽 모두에 알려졌다. 그런데 타이완의 실체는 중국에서 14세기까지도 명확하지 않았고, ‘타이완(臺灣)’이란 이름은 17세기에야 확정되었다.

『수서(隋書)』(636)에 나오는 ‘류구(流求)’란 이름이 타이완을 가리킨 것으로 보기도 한다. 류구를 ‘대(大)류구’로, 타이완을 ‘소(小)류구’로 적은 기록이 14세기까지 중국에서 나타난 데서 그 시대 타이완의 존재감이 얼마나 빈약했는지 알아볼 수 있다.

덩치 큰 타이완보다 먼저 알려져
백제 멸망 후 중·일 항로로 부각

15세기 해상 요충지에 류구왕국
바다 건너온 중국인이 지배계층

‘메이지유신’ 일본, 1872년 정복
7년 뒤 사라져 오키나와현으로

7세기 동아시아 문명권 성립

1761년 무렵 청나라 연경(베이징)을 방문한 류구왕국 사절단의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

1761년 무렵 청나라 연경(베이징)을 방문한 류구왕국 사절단의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

류구가 역사 무대에 등장한 때가 타이완보다 빠른 까닭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을 아직 못 봤다. 추측건대 한반도와 일본 남부를 포함하는 동아시아문명권의 7세기경 성립에 중요한 원인이 있는 것 같다. 7~9세기 일본 견당사(遣唐使)의 항로 변천에서 알아볼 수 있다.

630~665년 기간에는 한반도 남해안과 서해안을 따라가는 항로였다. 백제가 멸망 전에 왜(倭)의 중국 왕래를 도와주던 상황을 보여준다. 702~752년에는 류구 항로를 이용하다가 773~838년에는 규슈 연안에서 닝보(寧波) 방면으로 곧장 건너가는 항로로 바뀌었다. 중국 직항이 가능한 선박과 항해술이 확보될 때까지 류구 항로가 필요했던 것 같다.

1830년 중국으로 향하는 류구왕국 사절단 선대(船隊). [사진 위키피디아]

1830년 중국으로 향하는 류구왕국 사절단 선대(船隊). [사진 위키피디아]

7~8세기에 류구에 대한 일본인의 관심이 커지던 상황이 『일본서기(日本書紀)』(720)와 『속일본기(続日本紀)』(797)에 나타나 있다. 류구에 대한 일본의 관심은 배경의 중국 때문이었고, 중국의 관심은 배경의 일본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타이완의 존재도 중국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타이완의 배경에는 망망대해뿐이었다.

타이완이 해양문명권에 머물러 있던 반면 류구는 대륙문명권에 가까워졌기 때문에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일찍 알려진 것이다. 타이완이 머물러 있던 해양문명권을 중국에서는 ‘남도(南島)’ 문명이라 부른다. 서쪽으로 마다가스카르에서 동쪽으로 하와이와 이스터섬까지 태평양-동남아-인도양 일대에 널리 분포된 어족(語族) 이름 ‘오스트로네시아(Austronesia)’를 번역한 말이다. 이 글에서는 “남양(南洋)”으로 쓰겠다.(‘-nesia’는 폴리네시아·인도네시아 등 용례에서 ‘섬’만이 아니라 섬들을 둘러싼 바다까지 포괄하는 뜻이다. ‘양(洋)’은 동양·서양 등 용례에서 ‘바다’가 아니라 광대한 지역과 해역을 포괄하는 의미다.)

해양 세력 앞지른 대륙 세력

에도(江戶) 시대의 류구왕국 사절단(1832). 악대를 포함해 98인으로 구성됐다. [사진 위키피디아]

에도(江戶) 시대의 류구왕국 사절단(1832). 악대를 포함해 98인으로 구성됐다. [사진 위키피디아]

타이완 원주민의 언어가 남양어족의 가장 오래된 형태로 확인되어 있다. 타이완은 이 어족 분포 지역의 중앙이 아니라 경계선 위에 있다. 이 어족이 타이완으로부터 확산해 나간 것이라면, 왜 한 쪽 방향으로만 확산해 나갔는지 의문이 따른다.

대답은 간단하다. 해양문명인 남양문명이 대륙문명에 밀려난 결과다. 남양어의 지금 분포 지역은 거의 모두 섬들이다. 로저 블렌치가 『오스트로네시아 팽창의 지도』(2009)에서 추정하는 이 어족의 최대 확장기 분포 지역에는 인도양과 태평양의 해안지대가 많이 들어 있었다. 애초에는 대륙의 해안지대까지 자리 잡고 있다가 대륙문명의 압력이 강해지는 데 따라 밀려난 것이다.(남중국 선사유적의 유전자 채취 연구를 통해 남양인이 꽤 깊숙한 내륙까지 자리 잡고 있던 상황이 밝혀지고 있다.)

집개 모양의 두 개 돛살로 만든 게집개돛(crab claw sail)은 소형 범선의 평형을 지켜주는 아웃리거(outrigger)와 함께 범선 디자인의 가장 뛰어난 발명품의 하나다. 필리핀 엽서(1940)에 그려진 오스트 로네시아 배에는 두 가지 요소가 갖춰져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집개 모양의 두 개 돛살로 만든 게집개돛(crab claw sail)은 소형 범선의 평형을 지켜주는 아웃리거(outrigger)와 함께 범선 디자인의 가장 뛰어난 발명품의 하나다. 필리핀 엽서(1940)에 그려진 오스트 로네시아 배에는 두 가지 요소가 갖춰져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류구열도는 물론 규슈 남부까지 한때는 남양문명권에 속해있었던 것으로 블렌치는 본다. 류구의 존재가 중국과 일본에 알려지는 7세기경이 갈림길이었다. 대륙세력의 생산력 발전이 해양세력을 앞지르기 시작한 때였다. 대륙문명권의 경제적-문화적 영향이 커지는 데 따라 류구인의 사용 언어가 남양어에서 대륙의 언어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언어 다음으로 남양문명이 널리 공유한 요소는 항해술이다. 단순하고도 효율적인 디자인의 배들이 일찍부터 만들어져 남양문명의 확산과 광대한 해역의 교역활동에 이용되고 중국의 정크선(junk)을 비롯한 많은 선박 형태의 모델이 되었다.

10세기경까지는 인도양과 남중국해 교역활동의 주역이 남양인이었다. 중화제국이 남해안까지 확장되고 이슬람제국이 인도양 연안까지 확대되면서 역할을 넘겨받기 시작했지만, 두 문명권 사이 중계무역은 16세기 초 유럽인이 나타날 때까지도 남양인의 손에 남겨져 있었다.

중·일 사이에서 번영한 류구 왕국

류구국 왕궁 슈리(首里)성에서 나하(那覇)시를 내려다본 풍경. [사진 위키피디아]

류구국 왕궁 슈리(首里)성에서 나하(那覇)시를 내려다본 풍경. [사진 위키피디아]

8세기 말부터 일본 기록에서 사라졌던 남쪽 섬들이 다시 나타난 것은 997년, 해적 활동을 통해서였다. 7~8세기에 강했던 육지세력의 압력이 9~10세기에 줄어들면서 해상세력의 힘이 해적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11세기 들어 육지세력의 반격이 시작된다.

류구열도 중 오키나와현에 속한 것은 남쪽의 절반이다. 북쪽 절반은 사쓰난(薩南·사쓰마의 남쪽이란 뜻) 제도라 하여 가고시마현에 속한다. 11~15세기 중에 규슈 영주들의 확장 노력이 미친 것이 사쓰난의 범위였다. 그 남쪽의 오키나와섬에는 그 사이에 삼산(三山)시대를 거쳐 류구국이 세워졌다.

김경진 기자

김경진 기자

오키나와섬은 면적이 약 1199㎢, 제주도보다 작은 섬이 북산·중산·남산으로 쪼개져 있었다니 제주도의 삼성혈(三姓穴)이 떠오른다. 그중 중산이 강성해져서 1429년까지 경쟁자를 물리쳤는데, 이미 류구왕으로 명나라의 책봉을 받고(1422) ‘상(尙)’이란 성을 하사받고(1428) 있었다.

류구국은 일본보다 중국과 가까웠다. 1392년에 명 홍무제가 푸젠성 주민 36가구를 보내주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황제가 보내주지 않아도 수요는 공급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많은 중국인이 오키나와로 건너가 선진기술을 전파하며 지배계층으로 자리 잡았다.

명나라의 해금(海禁) 정책 아래 류구국은 조공국의 특혜로 번영을 누렸다. 특히 16세기 중엽 일본의 중국 조공이 끊기면서 류구왕국의 황금시대가 펼쳐졌다. 1609년 사쓰마번(藩)의 류구 정벌은 임진왜란 때의 비협조를 빌미로 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류구의 번영을 탐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황금알 사라지자 잡아먹힌 거위

청나라에 조공을 바쳤던 외국인을 그린 ‘황청직공도(皇清職貢圖·1769년경)에 등장하는 류구인. [사진 위키피디아]

청나라에 조공을 바쳤던 외국인을 그린 ‘황청직공도(皇清職貢圖·1769년경)에 등장하는 류구인. [사진 위키피디아]

구메무라(久米村)는 홍무제가 보내준 36가구로 출발한 동네라 하는데, 학술과 문화의 본산으로서 많은 학자-관료를 배출한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일반인은 구메무라 주민을 중국인의 후예로 여겼다.

1609년 정벌에 항복한 왕과 신하들이 사쓰마에 대한 충성 서약을 요구받았을 때 단 한 명 거부하고 처형당한 대신이 있었다. 구메무라 출신이었고, 이름도 중국식인 정동(鄭迵)으로 전해진다. 류구 조정 내의 친일-친중 대립을 말하기도 하는데, 동의하기 어렵다. 사상계에서 구메무라의 역할이 워낙 크고 경제면에서 중국과의 관계가 워낙 중요했기 때문이다.

류구국을 중국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었다는 사실은 정벌 후 일본 측의 조치가 말해준다. 잡아간 왕과 신하들을 2년 후 돌려보내고 구메무라를 오히려 더 키워주었다. 사쓰마에 정복당한 사실을 명나라에서 알아채지 못하게 하도록 애를 썼다. 거위를 잡아먹는 대신 계속 황금알을 낳도록 키우려는 것이었다.

청나라에 조공을 바쳤던 외국인을 그린 ‘황청직공도(皇清職貢圖·1769년경)에 등장하는 류구인. [사진 위키피디아]

청나라에 조공을 바쳤던 외국인을 그린 ‘황청직공도(皇清職貢圖·1769년경)에 등장하는 류구인. [사진 위키피디아]

류구는 두 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260여 년을 지내게 되었다. 이 이중성을 중국에서는 끝내 알아채지 못했을까. 그럴 것 같지 않다. 임진왜란 후 중국 조정은 일본을 공식적으로는 외면했지만, 이웃의 작지 않은 나라를 아주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17~19세기를 통해 류구는 두 나라 사이를 이어주는 역할로 안정과 번영을 누렸다.

19세기 후반의 격변 속에 류구의 이중성은 가치를 잃었다. 1872년 일본이 류구국을 합병, ‘류큐’번(藩)을 선포할 때 청나라는 제 앞 가리기에 바빴다. 1874년에는 일본군이 타이완에 출병했다. 타이완에 표류한 ‘류큐인’ 수십 명의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는 명분이었다. 1879년 류큐번을 오키나와현으로 개편할 때는 별다른 저항이 없었다. 상당수 류구인이 중국으로 망명했을 뿐이고 류구국왕은 류큐번주를 거쳐 일본국 귀족에 편입되었다.

김기협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