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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대사관, 윤 대통령 연설에 “깊은 유감”…외교가 “주재국 수반에 결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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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장호진 외교부 1차관(오른쪽)은 지난 19일 안드레이 쿨릭 주한 러시아대사를 초치해 북한과의 군사협력 움직임을 즉각 중단하고 유엔 안보리 결의를 준수할 것을 촉구했다. [사진 외교부]

장호진 외교부 1차관(오른쪽)은 지난 19일 안드레이 쿨릭 주한 러시아대사를 초치해 북한과의 군사협력 움직임을 즉각 중단하고 유엔 안보리 결의를 준수할 것을 촉구했다. [사진 외교부]

주한 러시아대사관이 21일 윤석열 대통령의 전날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겨냥해 “대한민국의 수장이 북·러 협력을 깎아내리는 선전전(propaganda campaign)에 동참한 데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외교가 일각서는 “주재국 국가 수반에 대한 대사관 측의 이 같은 비판은 심각한 외교 결례”라고 지적했다. 북·러 정상회담 이후 우려했던 러시아의 친북 행보가 본격화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사관은 이날 페이스북 계정에 ‘제78차 유엔총회에서 윤 대통령의 발언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입장문에서 이같이 비판하고 “메가폰 외교에 의한 근거 없는 추측성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메가폰 외교’는 이성적인 협의 대신 공개적인 비방을 통해 압력을 가하는 방식을 뜻한다.

대사관은 그러면서 “이는 도발적이고 적대적이며, 서방이 미국 주도로 러시아를 향해 집단적으로 벌이는 공세적인 하이브리드 전쟁과 맥을 같이한다”고 주장했다.

대사관은 윤 대통령의 연설을 “콜린 파월 전 미국 국무장관의 악명 높은 거짓 유리병(vial)”에 비유하기도 했다. 2003년 파월 당시 미 국무장관은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개발 의혹을 제기하며 하얀색 유리병을 들어 보였는데, 러시아는 미국이 제시하는 ‘거짓 증거’라는 의미로 이 표현을 자주 쓴다.

대사관은 나아가 “한국 지도부가 정신을 차리고(sober) 객관적으로 현 상황을 파악해 행동하길 바란다”며 “계속해서 반(反)러시아 노선을 밟을 경우 한·러 관계와 한반도에 미칠 부정적 결과를 고려하길 바란다”고 위협했다.

앞서 20일(현지시간) 윤 대통령은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78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러·북 군사 거래는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안보와 평화를 직접 겨냥한 도발이 될 것”이라며 “대한민국과 동맹, 우방국들은 이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주한 러시아대사관은 연이어 한국 정부를 향해 외교적 결례에 해당하는 언행을 서슴지 않고 있다. 지난 19일 장호진 외교부 1차관은 안드레이 쿨릭 러시아대사를 초치했는데, 다음 날 대사관은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한·미 언론이 과장되게 유포하는 추측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점을 한국 파트너에게 정확히 밝혔다”며 반발했다. 초치된 대사가 주재국 정부의 입장에 반하는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내는 것은 관계 악화를 개의치 않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강순남

강순남

당시 대사관은 “한반도는 물론 대한민국 안보에 대한 실질적인 위협은 한·미 양국이 벌이고 있는 맹렬하고 불균등한 군사활동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한국 측에 상기시키고자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이날 러시아를 비롯한 제3국과의 무기 거래 및 불법 금융 거래에 관여한 혐의 등으로 개인 10명과 기관 2개에 대한 독자 제재에 나섰다. 제재 대상에 오른 북한의 고위 인사는 강순남 국방상, 박수일 전 총참모장, 이성학 국방과학원 당 책임비서 등이다. 강 국방상은 최근 김정은의 방러 일정에 동행했다.

무기 거래에 관여한 두 기관은 슬로바키아 국적의 베르소와 북한 정찰총국이 운영하는 글로콤이다. 미 재무부에 따르면 베르소의 소유주인 아쇼트 므크르티체프는 지난 3월 북한과 러시아 간 무기 거래를 중재하고 20종이 넘는 무기와 탄약을 북한에서 러시아로 넘기는 대신 러시아로부터 식량을 포함한 자재를 북한에 보내는 계획을 조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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