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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민근의 시선

한국 경제 ‘킬러문항’된 가계부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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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조민근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디렉터

“손들었습니다. 우리가 졌어요.”

박근혜 정부 시절이던 2014년 7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금융위원회 고위 간부의 목소리엔 짙은 허탈감이 배어 나왔다. 주택대출 규제(LTV·DTI)를 놓고 국토교통부와 줄다리기를 벌이던 상황에서 나온 패배 선언이었다. 경기를 살려야 한다는 전방위 압박에도 당시 금융위는 나름 대차게 버티는 듯했다. 자칫 가계부채 증가세에 불을 붙일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의도된 오답 낸 박근혜 정부
‘재수’도 실패한 문재인 정부
시간 갈수록 높아진 난이도
윤석열 정부도 시험대 올라

하지만 힘의 추는 시작부터 기울어있었다. 2기 경제팀 수장이자 정권 실세로 꼽히던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부동산 경기 부양 드라이브를 걸고 나선 참이었기 때문이다. 금융위는 물론 한국은행도 그 기세에 눌리는 듯했다. 대출규제 완화와 함께 기준금리도 본격적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최 부총리가 이주열 당시 한은 총재와 회동하고, 그 유명한 ‘척하면 척’이란 발언이 나온 뒤다.

그해 말 가계대출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80%선에 도달했다. 부채비율 80%는 임계점으로 불린다. 경제 문제가 항상 양면이 있듯 빚도 마찬가지다. 적정한 수준이라면 부를 키우고, 소비를 촉진한다. 하지만 어느 수준 이상으로 커지면 자산 거품을 만들고, 채무부담에 소비를 억누르는 부정적 효과가 더 커진다.

‘금융위의 저항’에서 엿보이듯 당시 정책 담당자들도 이걸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당시엔 가계부채보다 시급한 게 경기 추락을 막는 것이란 논리가 힘을 얻고 있었다. 경제가 성장해야 궁극적으로 빚 부담이 줄고, 체력을 회복해 구조개혁에도 나설 수 있다는 명분도 덧붙었다. 당시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후유증에 ‘뉴노멀’(New normal)로 불리는 저성장 기조가 굳어지고 있던 참이었다. 여기에 세월호 참사 여파까지 덮친 탓에 뭐라도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했다.

결국 박근혜 정부는 가계부채에 관한 한 ‘의도된 오답’을 냈다. 당장 풀기 어려운 문제에 매달려 시간을 허비하느니 상대적으로 쉬운 문제부터 풀어 점수를 끌어올리겠다는 수험생들의 전략과 유사했다. 하지만 늘 상황이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는 법이다. 탄핵으로 정권이 좌초하면서 중도에 시험장을 나오는 신세가 됐다.

이어 들어선 문재인 정부는 “인위적 부양은 없다”며 전 정부와 차별화했다. ‘빚내서 집 사라’ 대신 ‘집은 사는(buy) 게 아니라 사는(live) 곳’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넘치는 유동성에 집값 흐름이 불안하게 흘러갔지만 문재인 대통령도 “부동산 문제는 자신 있다고 장담하고 싶다”며 호기를 부렸다. 전면에 나선 건 부동산 정책 실패로 홍역을 치렀던 참여정부 시절 인사들이었다. 재수까지 했는데 또다시 실패할 리는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결과는 모두가 알 듯 참담한 실패였다. 27번의 대책을 내놨지만 늘 정답과는 거리가 있었다. 각종 대출 규제와 세금 처방이 잇따랐지만 한쪽을 누르면 한쪽이 부푸는 풍선효과가 빈발했다. 정책에 대한 불신이 커지며 가수요를 자극했다. 반면 꾸준한 공급 신호가 필요하다는 전문가들의 조언은 무시됐다. 지나치게 강한 자기 확신이 독이 된 셈이다. 문제를 제대로 읽고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전에 답부터 내놓는 꼴이었다. 2020년 말 가계부채 비율은 결국 100% 선을 돌파했다.

윤석열 정부에선 그나마 한시름 놓는가 했다. 2021년 시작된 급격한 기준금리 인상에 집값은 꺾이고, 늘기만 하던 가계 빚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금리 인상 행진이 멈추고 대출 규제가 서서히 풀리자 가계부채는 여지없이 다시 늘기 시작했다. 은행권 가계대출은 5개월 연속 증가세다.

그사이 문제의 난이도까지 ‘킬러 문항’ 수준으로 올라간 상태다. 부채비율(105%)은 주요국 중 스위스, 호주에 이어 세계 3위다. “부채 규모가 너무 커 이자율이 조금만 올라가도 쓸 수 있는 여력이 줄고, 성장률을 낮추는 효과가 나타난다”는 게 한은 이창용 총재의 경고다. 이제는 부채의 증가 속도나 질의 문제를 넘어 규모 자체만으로도 문제가 되는 수준이란 얘기다.

이 총재는 또 당장은 대출 규제 등 미시정책으로 대응해야겠지만 잘 먹히지 않을 경우 금리를 올리는 거시정책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언급했다. 그만큼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의미다.

한은이 잇따라 경고음을 낸 데 이어 정부도 곧 부동산 대책을 내놓을 예정이라고 한다. 본격적으로 시험대에 선 셈이다. 불안한 시장 심리를 조기에 안정시킬 확실한 신호를 기대한다. 박근혜 정부 때처럼 피해가거나, 문재인 정부 때처럼 실패를 반복할 여유가 이제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