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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세정의 시선

'전략적 시간 벌기' 중인 시진핑의 다음 행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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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장세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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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요즘 깊은 고민에 빠진 것 같다. 국내적으로 부동산·소비 등 경제가 빨간 불이 켜졌다. 청년 실업률 통계 발표조차 중단했다. 지난달 베이다이허(北戴河) 회의에서 나라 걱정하는 원로들의 쓴소리를 듣고 시 주석이 화를 냈다는 외신 보도도 있었다.

 밖으로는 패권 경쟁 와중에 미국의 중국 압박이 갈수록 강력해지고 있다.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최근엔 북한과 러시아가 모종의 무기 거래로 중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이런 국내외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깊은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8월 22일(현지시간) 남아공 프리토리아에서 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에게서 '남아공 훈장' 메달을 받고 있다. 하지만 시 주석의 안색은 매우 어두워 보인다. [AFP=연합뉴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8월 22일(현지시간) 남아공 프리토리아에서 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에게서 '남아공 훈장' 메달을 받고 있다. 하지만 시 주석의 안색은 매우 어두워 보인다. [AFP=연합뉴스]

 무엇보다 시 주석의 뒷머리를 짓누르는 최대 스트레스 요인은 미국의 대중 압박이다. 시 주석은 최근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아세안+3과 동아시아정상회의에 불참했고, 인도가 주최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직접 대면을 피하려 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심지어 오는 1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 여부도 불투명하다.

2022년 11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만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조 보이든 미국 대통령. 시 주석은 최근 아세안+3와 G20 회의에 불참했다. [AFP=연합뉴스]

2022년 11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만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조 보이든 미국 대통령. 시 주석은 최근 아세안+3와 G20 회의에 불참했다. [AFP=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켜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체포영장을 발부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해외 순방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정이 많이 다른 시 주석이 지난 3월 국가주석 3연임 확정 이후 러시아와 남아공을 제외하면 줄곧 국내에 머물고 있어 온갖 억측이 나온다. 80대 고령인 바이든 대통령의 활발한 해외 순방과도 대비된다.

내우외환에 고심 깊어, 숨 고르기
패권추구 아닌 개혁·개방이 살 길
이웃 한국 존중 태도부터 보여야

 시 주석의 '중난하이(中南海) 칩거' 행보에 대해 외교가에선 "전략적 시간 벌기로 보인다"는  분석이 들린다. 동맹과 적을 제대로 구분하지도 않고 주먹을 마구 휘둘렀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달리 노련한 외교 전략가인 바이든 대통령의 '정밀 타격'에 중국 지도부가 상당히 당황하고 있다는 전언도 있다.
 '전랑(戰狼) 외교'의 상징 인물이던 친강(秦剛) 외교부장이 스캔들 의혹 와중에 지난 7월 면직되고, 상대적으로 온건한 왕이(王毅) 정치국원이 외교부장으로 복귀하면서 중국은 외교 전략을 다시 가다듬을 계기가 마련됐다. 한·미·일 협력 강화에다 북·러 밀착으로 신경이 곤두선 중국의 다음 행보가 그래서 초미의 관심사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3일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양국 사이에 모종의 '무기 거래'가 있었다는 관측이 나왔다. [AP=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3일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양국 사이에 모종의 '무기 거래'가 있었다는 관측이 나왔다. [AP=연합뉴스]

 한 외교 소식통은 중국 최고 지도부가 한국의 내년 총선과 미국의 내년 대선을 지켜보며 다음 카드를 내놓을 것으로 관측했다. 선거 과정에서 한국의 여론에 영향을 주는 사이버 공작이 벌어질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막후 거래가 쉽다고 보는 트럼프의 당선을 위해 모종의 움직임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중국의 미래는 한국 총선과 미국 대선 결과보다 중국 스스로 어떤 마음을 먹느냐가 더 근본적 변수일 것이다. 힘으로 기존 국제 질서를 뒤엎어 중국몽(中國夢) 실현에 집착하면 국제사회의 경계심만 키울 뿐이다. 예컨대 푸틴의 속삭임에 넘어가 우크라이나 전쟁의 늪에 빠져들면 중국엔 백해무익이다. 위험천만한 김정은의 뒷배 역할을 다시 자처할 경우 국제사회에서 그동안 쌓은 긍정적 자산까지 송두리째 날릴 것이다.
 지금 중국 앞에 두 개의 전략적 선택지가 놓여 있다. 다시 성장과 발전의 길로 가느냐, 아니면 '중국 정점론(Peak China)'처럼 내리막길로 가느냐다. 중국이 기적에 가까운 발전에 성공한 비결은 누가 뭐래도 덩샤오핑(鄧小平)이 설계한 개혁·개방의 길로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마오쩌둥(毛澤東) 시대로 되돌린다면 국가와 인민에게 이로울 것이 무엇이겠나. 중국이 발전의 동력을 회복하려면 개혁·개방을 다시 가속하는 수밖에 대안이 없어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22년 11월 15일(현지시간) 인도네시아 발리 한 호텔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윤 대통령 취임 이후 첫 양국 정상의 만남이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22년 11월 15일(현지시간) 인도네시아 발리 한 호텔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윤 대통령 취임 이후 첫 양국 정상의 만남이었다. [연합뉴스]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시위 이후 미국·일본·유럽의 제재로 고립된 상황에서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를 계기로 개혁·개방 노선으로 복귀해 한·중 수교를 결단했던 경험에서 배워야 한다. 중국은 다시 한국에 손을 내밀고 협력을 요청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가장 가까운 이웃인 한국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한국인의 마음부터 얻어야 한다. 국제사회가 주시한다. "미국 승리와 중국 패배에 베팅하면 잘못된 판단"이라는 식의 무례한 외교로는 혐중 여론만 자극할 뿐이다.
 오는 24일 개막하는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 한국 정부는 한덕수 총리를 파견해 중국을 최대한 예우할 것같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일·중 정상회의에 중국 지도자의 방한을 제안했다. 중국은 '2030 부산 엑스포' 유치 지지 선언으로 화답하면 어떨까. 수교 30주년 이후 새로운 30년을 시작하며 한·중 관계가 정상화되면 중국도 국제사회에서 다시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