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태극기 휘날리며 돌아왔다?…'흙수저의 승리' 서윤복 이야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영화 '1947 보스톤'으로 돌아온 강제규 감독을 12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났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1947 보스톤'으로 돌아온 강제규 감독을 12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났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1947년 4월 19일, 미국 보스톤마라톤대회에서 단신의 조선 청년이 세계 신기록을 작성했다.
승부는 마지막 10여㎞. 쟁쟁한 마라톤 선수들이 나가떨어져 ‘하트브레이크 언덕’이라 불리는 뉴턴힐에서 결판났다. 체력이 바닥난 경쟁자들을 제치고 그는 400m 높이 언덕길부터 치고 나갔다. 구경꾼의 개를 피하려다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나 달렸다. 마침내 2시간 25분 39초, 1위로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광복 2년을 맞는 나라 ‘코리아’에서 온 서윤복(1923~2017) 선수였다.
보스톤 사상 동양인 최초 우승이자, 해방 후 첫 국제대회 승리였다. 서윤복 선수를 길러낸 이가 1936년 독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1912~2002) 선수였다. “승리가 눈앞에 있었다. 가슴에 빛나는 태극마크 …나는 서 군이 부러웠다.” 손기정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의 회고다.

27일 개봉 영화 '1947 보스톤'

일장기 금메달의 치욕, 태극마크 승리 빚었다  

영화 '1947 보스톤'은 1947년 광복 후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 대회에 출전하기 위한 마라토너들의 도전 여정을 담았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1947 보스톤'은 1947년 광복 후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 대회에 출전하기 위한 마라토너들의 도전 여정을 담았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베를린 금메달 시상대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가렸단 이유로 일제에 의해 더는 마라톤을 못 하게 된 손기정은 훗날 코치가 된 베를린 동메달리스트 남승룡(1912~2001) 선수와 함께 최초의 태극전사 서윤복을 길러냈다. 그 자신이 베를린에서 세운 2시간 26분 42초 기록을 11년 만에 제자 서윤복이 갱신했다.
세 사람의 이야기가 영화 ‘1947 보스톤’(27일 개봉)을 통해 추석 극장가를 찾는다. 강제규(61) 감독이 연출했다. 남북한 분단 역사를 소재로 한국형 블록버스터 '쉬리’(1999)를 탄생시킨 그다. ‘태극기 휘날리며’(2004)는 한 형제를 갈라놓은 민족상잔의 비극을 대규모 전투 액션에 담아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 ‘1947 보스톤’ 역시 국가의 운명에 휘말린 개인의 초상이란 주제를 잇는다. 베를린 올림픽 시상대에서 일본국가를 들으며 손기정 선수가 느꼈을 모멸감을 ‘차세대 손기정’의 승리로 떨쳐냈다.
미군정 상황으로 인해 성조기를 달고 달릴 뻔한 주인공들이 태극마크를 되찾고, 아무도 예상 못 한 보스톤 마라톤 역전 우승을 끌어내는 과정이 도드라진다.
 미국에 가기 전 아픈 어머니를 위해 냉면 배달로 ‘재능 낭비’를 하던 극 중 서윤복(임시완)이 남승룡(배성우)‧손기정(하정우) 코치에 의해 마라톤 선수로서 각성하는 과정은 다소 낯익은 설정. 강 감독은 "이런 흙수저 청년의 인간 승리와 역사적 마라톤 우승 장면을 연결하는 것이 이번 영화의 동기였다"고 했다.

강제규 "흙수저 청년들의 꿈…태극마크만큼 중요"

12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그는 “처음부터 중요했던 장면이 어린 시절 아픈 엄마를 위해 서낭당에서 밥 훔쳐먹으려고 수없이 달린 무악재 고개가 보스톤에서 1‧2등 선수들을 추월한 하트브레이크 언덕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였다”면서 “광복 이후 최초로 태극기를 달고 달린 뿌듯함”만큼 “한 인간이 소중한 꿈을 이루는 도전”에 무게를 실었다고 소개했다. 어쩌면 ‘국뽕’ 흥행공식이 더는 듣지 않는 엔데믹 극장가의 생존전략일지 모른다. 강 감독은 “‘국뽕’은 기획 초반부터 우려했다”면서 “요즘 20~30대 관객들이 1940년대 얘기에 별 관심 없잖나. 대학 때 영화 ‘불의 전차’(1981)를 보고 달리기 영화를 꼭 만들고 싶었기에 젊은 관객들이 그 시대 손기정‧남승룡‧서윤복에 자연스럽게 동화될 수 있도록 각색 작업으로 허들을 허무는 데 집중했다”고 말했다. “국가적 대의 명제를 위한 영화였다면 안 했다. ‘태극기 휘날리며’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킨 젊은이 얘기였다면 안 했을 거다. 자존심 강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려는 청년들이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 죽임당한 한국전쟁의 본질을 건드리려 한 것”이라며 “‘1947 보스톤’도 세 주인공이 똑같이, 아무것도 없는 흙수저에서 유일하게 잘할 수 있는 달리기를 통해 꿈을 실현하고 생존해나가는 과정이 매력이다. 태극마크로 우승한 감격은 부가적인 것”이라 짚었다.
“1947년 손기정은 내가 국가라는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서윤복만 해도 나라 없는 시절을 손기정만큼 뼈저리게 느끼지 않은 세대예요. ‘선생님은 일장기 달고 뛰었지만 피는 조선사람 아니냐’는 그의 대사도 있죠.” 요즘 관객까지, 각자 시대의 ‘국가와 나’의 관계의 미세한 차이를 가늠해볼 수 있음 직한 영화다.

배성우 음주운전·팬데믹…3년 만에 개봉

영화 '1947 보스톤'에는 어렵게 미국 보스톤에 간 손기정 선수(왼쪽 두번째부터, 하정우), 서윤복(임시완) 등이 마라톤 대회 출전 유티폼에 성조기가 박힌 것을 두고 항의하는 과정이 나온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1947 보스톤'에는 어렵게 미국 보스톤에 간 손기정 선수(왼쪽 두번째부터, 하정우), 서윤복(임시완) 등이 마라톤 대회 출전 유티폼에 성조기가 박힌 것을 두고 항의하는 과정이 나온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사실 ‘1947 보스톤’은 윤제균 감독이 먼저 손기정 선수 영화를 진행 중인 상황에서 기획됐다(현재 CJ ENM을 통해 한미 합작영화로 준비 중이다). 이후 강 감독은 손기정‧남승룡‧서윤복 세 마라톤 선수가 힘을 합친 불굴의 도전기에 비중을 실어 2020년 1월 촬영을 마쳤다. 그러나 사달이 났다. 주연 배우 배성우가 음주사건을 일으킨 것. 코로나19 팬데믹까지 겹쳐 미뤘던 개봉을 3년 만에야 하게 됐다. 배성우 분량을 가능한 한 재편집했다.
영화에선 서윤복‧남승룡 선수가 대회 주최 측을 설득해 태극기만 달고 뛴 거로 나오지만, 당시 여러 자료를 보면 정황상 미군정 성조기와 태극기를 함께 달고 뛰었을 가능성이 있다. 강 감독은 이에 “여러 설이 많다. 정설이란 게 없다”고 답했다.
고증 논란에도 반복해서 역사물에 도전하는 이유에 대해 강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 SF에도 도전하려 했지만, 미래는 할리우드에서 많이 찍잖아요. 결국 우리 살아온 과거 잘 들여다보는 게 미래를 예견하는 일 아닐까요. 우리가 몰랐던 소중한 발자취 다루는 게 어쩌면 SF란 생각도 듭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