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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무죄 나온 '마취뒤 사망한 의료소송'…민사는 9000만원 배상, 왜

중앙일보

입력

대법원 전경. 뉴스1

대법원 전경. 뉴스1

의료소송 형사사건에서 의료진에게 무죄가 선고되더라도, 민사소송에선 그 과실로 인한 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수술을 위해 마취 후 사망한 70대 남성의 유족이 병원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의료진의 과실을 인정해 9284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최근 확정했다. 해당 마취과 의사가 업무상 과실치사로 기소된 형사사건에 대해선 ‘과실은 있지만,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증명이 부족하다’며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마취과 전문의 자리 비운 사이 심정지…3시간여 뒤 사망

2015년 12월 어깨 관절경 수술을 하러 병원에 갔던 73세 남성 A씨는 마취 직후 심정지가 발생했고 결국 3시간 뒤 사망했다. 마취과 전문의 B씨는 오전 10시15분에 마취를 시작했고, 전신마취와 어깨 국소마취가 끝난 뒤인 10시42분쯤 마취과 간호사 C씨에게 모니터링을 맡기고 수술실에서 나갔다.

11시에 정형외과 집도의가 어깨 수술을 시작했는데 11시15분부터 갑자기 심박동수, 산소포화도가 뚝뚝 떨어지는 등 이상 소견이 감지됐다. 간호사의 호출로 다시 수술실로 돌아온 B씨는 11시20분부터 혈압을 올리는 약물,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장착 등 응급처치를 하기 시작했다.

A씨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가 다시 대형병원 응급실로 이송됐지만 심장박동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오후 2시28분 사망했다. 마취과 의사 B씨와 간호사 C씨는 업무상과실치사 및 진료기록부 허위기재 등 의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고, A씨의 유족은 병원을 상대로 약 1억67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업무상과실치사는 무죄, 손해배상 책임은 인정

이 사건 형사 재판의 1심은 의사 B씨와 간호사 C씨의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들의 과실이 A씨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입증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의료법 위반에 대해서만 벌금 700만원을 선고했다. 반면 2심은 두 혐의 모두 유죄로 판단해 금고 8월에 벌금 700만원을 선고했다. 마취 과정에서 저혈압 증상이 반복되는 등 이상 증상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었고, B씨 등의 업무상 과실로 사망 위험성이 사회적 용인 수준을 넘어 급격히 높아졌다는 게 명백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B씨 등의 과실은 인정하지만, 그로 인해 A씨가 사망에 이르렀다는 점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입증되지 않았다고 보고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에 대해 무죄 취지로 사건을 원심 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이 사건의 민사소송에서는 1심과 2심 모두 업무상 과실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A씨가 사망에 이르렀다며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대법원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판결을 확정했다.

의료진 '소극적 과실'에 대한 배상 여지 넓혀

대법원은 “민사소송에선 환자 측이 진료상 과실을 입증한다면, 손해까지의 인과관계를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입증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시했다. 의료진의 과실로 사망에 이르렀다는 게 ‘막연한 가능성’ 정도가 아니라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는 정도로 입증되면 인과관계를 추론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의료소송의 특성상 환자 측이 의료진의 과실을 증명하기도 어렵고, 심지어 의료진조차 과실과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를 알기 어려운 경우도 많기 때문에 정확한 인과관계를 밝히는 건 어렵다는 걸 고려한 판결이다.

이번 판결은 형사사건에서 무죄가 나오더라도, 민사소송에서 배상 책임이 인정될 여지를 넓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대법원은 1995년 ‘일반인의 상식으로 과실 행위를 입증할 수 있고, 그 외에 다른 원인이 없다는 사정이 입증되면 의료상 과실과 결과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본다’고 판결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 판례는 ‘적극적 의료행위’만 과실로 인정한 판례로, 알면서도 처치하지 않은 행위나 처치가 늦은 경우 등 소극적 과실은 다루지 않았다.

그런데도 법원은 부작위나 치료지연 등 소극적 과실에 대해서도 1995년 판례를 인용해 의료진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경우가 있었다. 대법원 관계자는 “그간 법과 현실의 괴리가 있던 부분에 대해 현실에 맞게 법리를 새로 갖춘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법 "같은 사안 형사·민사 판단 달라질 수 있어"

다만 대법원은 형사사건의 경우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의 증명’이 여전히 필요하며, 민사사건처럼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대법원은 “업무상 과실의 존재, 그로 인한 사망의 결과까지 엄격한 증거에 따라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이 이뤄져야한다”며 “그에 관한 판단이 (인과관계를 추정할 수 있는) 동일 사안의 민사재판과 달라질 수 있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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