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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바이오·헬스·빅테이터…딥테크 스타트업 이끌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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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최준호 기자 중앙일보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R&D 패러독스 극복하자 〈56〉 한국과학기술지주 최치호 대표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이 위기 상태다. ‘코리아 R&D 패러독스’의 단골 대상으로 거론되더니, 연구개발 예산 감축의 주요 대상으로 지목돼 홍역을 치르고 있다. 지난달 28일 공개된 내년 출연연 예산은 올해보다 10.3%(3000억원)나 줄어든 2조1000억원. 당장 연구 현장에서는 계약직 연구원 해촉과 기존 연구개발 및 신규 사업이 중단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대통령이 언급한 ‘R&D 카르텔’에 대한 ‘정밀 제거’가 아닌, 연구 예산의 일괄 삭감은 ‘성과 없는 R&D’와 같은 출연연 고질병을 고칠 수 없을 것이라는 반론도 나온다.

정부출연연 기술 사업화로 연결
10년간 142개사에 566억 투자

딥테크 분야 집중, 전체의 95%
투자기업 생존율도 93% 달해

내년도 R&D 예산 축소 걱정돼
연구자들에 기업가정신 키워야

새로운 산업 먹거리 창출 목적

한국과학기술지주는 KIST 등 국내 과학기술 분야 정부 출연 17개 연구기관들이 공동출자한 기술사업회 전문회사다. 최치호 대표가 출자사들 로고 앞에 섰다. 프리랜서 김성태

한국과학기술지주는 KIST 등 국내 과학기술 분야 정부 출연 17개 연구기관들이 공동출자한 기술사업회 전문회사다. 최치호 대표가 출자사들 로고 앞에 섰다. 프리랜서 김성태

그래서 더욱 강조되는 게 ‘기술사업화’다. 출연연에서 연구·개발한 신기술이 창업이나 기업 이전으로 이어지고, 새로운 산업 먹거리로 성장하는 그림이다. 올해로 만 10년을 맞은 한국과학기술지주는 그런 고민이 잉태한 결과물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17개 출연연이 기술사업화를 위해 함께 출자한 특수목적 전문 회사다.

성적표는 나쁘지 않다. 지금까지 142개 스타트업에 총 566억원을 투자했고, 이들 기업의 5년 이상 생존율이 93%를 넘는다. 기술지주회사가 R&D 패러독스의 탈출구가 될 수 있을까. 지난 5일 대전 도룡동 대덕테크비즈센터를 찾아 최치호 한국과학기술지주 대표를 만났다.

한국과학기술지주는 왜 생겨났나.
“과학기술분야 정부 출연연구기관의 연구 생산성 문제는 오래전부터 국정감사의 단골 메뉴였다. 기술이 사업화로 이어지지 않고, 연구를 위한 연구에만 그친다는 비판이었다. 기존 기술이전 중심의 사업화 방식은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다. 이 때문에 출연연의 우수기술을 이용한 창업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2013년 11월 전자통신연구원(ETRI)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등 17개 과기 출연연이 종잣돈 530억원을 모아 기술사업화 창업 전문회사인 한국과학기술지주를 만들었다.”

중소기업에 기술 이전, 그 명암

기술 이전이 왜 어려운가.
“우리나라 출연연이 개발한 기술의 90% 이상이 중소기업으로 이전되는데, 이들 기업의 기술 흡수 역량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사내에 부설 연구소를 두고 있더라도 박사급 인력이 있는 곳은 15%도 안 된다. 정부 과제를 수주해서 연구자의 인건비를 대는 현재의 PBS(Project Based System) 제도도 문제다. 새로운 과제를 계속 따와야 기관을 운영할 수 있는 시스템 아래에서는 기술 이전 이후까지 신경 쓰기 어렵다. 대기업들은 출연연의 기술을 불신한다. 실험실 수준에선 가능할지 모르지만, 규모를 키우고 상용화하는 수준까지 끌어올리기엔 모든 게 불확실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R&D 능력이 안 되는 중소기업들이 왜 기술 이전을 받나.
“기본적으로 출연연 기술이 도움될 거라고 생각하고 이전받는 것이지만, 다른 이유도 있는 게 현실이다. 출연연 기술을 이전받으면, 정부에서 주는 정책자금도 받을 수 있고, 출연연과 협력한다는 것만으로도 시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출연연도 기관평가에서 기술 이전 실적으로 가점을 받을 수 있는 점도 있다.”

기술사업화도 더욱 전문화해야

출연연 창업 역시 쉽지 않아 보인다. 연구소 창업기업 10개 중 1개 정도만 제대로 된 기술로 투자를 받는다는 증언도 있었다.
“결국은 양(量)에서 질(質)로 전환되는 거다. 최근 출연연 창업 사례가 크게 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거품이 없을 수 없다. 그건 서구 선진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이런 사례를 줄이려면 출연연 기술사업화(TLO) 조직의 전문성이 중요하다. 우리 출연연은 순환보직 구조인 데다 인센티브도 부족하기 때문에 TLO 조직이 전문성을 갖추기가 쉽지 않다.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한 기업가정신 교육 또한 필요하다.”

중앙일보가 매달 주최하는 혁신창업 포럼(SNK포럼) 참가자들은 “하이테크 창업으로 시장을 흔들어보겠다는 창업은 전체의 10%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나머지 90%는 연구자 경력을 바탕으로, 퇴직 후 정부 창업 지원사업을 수주하고 인건비를 받아내는 데 그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스타트업들의 특징은 창업 이후 제대로 된 투자는 한 차례도 받지 않고 사업 명맥만 이어간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창업을 내세운 과학기술지주의 성적표는 어떤가.
“지금까지 투자한 142개사의 총 기업가치는 1조5661억원에 달한다. 설립 10년이 지나니 회수 실적도 나오고 있다. 지금껏 34개사에 340억원을 회수했다. 이들 회사에 과학기술지주가 투자한 금액은 110억원이었다. 투자 회사 5년 이상 생존율이 스타트업 전체 평균(29.2%)보다 훨씬 높은 93.5%에 달한다. 코스닥 상장을 준비하는 기업도 나오고 있다. 수소연료전지 핵심소재를 만드는 코멤텍은 지난해 이미 56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내년 하반기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외에도, 전기차 배터리 모듈용 첨단 방열 소재를 생산하는 소울머티리얼, 항암제를 개발하는 원큐어젠, 자율주행 센서를 만드는 비트센싱 등도 후속 투자가 이어지고 있는 유망한 스타트업들이다.”

단기간에 성과 기대할 수 없어

김주원 기자

김주원 기자

주로 어떤 스타트업에 투자하나.
“출연연 창업기업의 특성상 딥테크(심도있는 기술) 분야가 95%에 달한다. 세부 분야별로는 바이오·헬스가 전체의 27%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친환경·에너지(24%), 빅데이터·인공지능(16%), 로봇(9%) 순이다. 창업 3년 미만 기업이 전체의 80%다.”
그간 ‘R&D 패러독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출연연 연구성과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었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처음엔 창업 초기 단계에 역할을 잘하면 된다는 생각에 투자도 그쪽으로만 집중했다. 스타트업을 위한 모태펀드도 수익을 중시하다 보니 3년 투자하고 4년 이내에 회수하는 식으로 관리기간이 짧다. 같은 목적으로 만든 서구 선진국 국부펀드는 10~20년 주기의 투자를 한다. 출연연 R&D 기반의 딥테크 창업은 성과가 금방 나기 어렵다. 기업이 성장하고 성공 스토리를 만들어내려면 후속 투자도 필요하고, 기업 홍보 등 다양한 지원이 필요하다. 이젠 벤처캐피털(VC)이 함께하는 공동·후속 투자가 초기 투자의 8배 이상이 될 정도로 체질이 바뀌었다. 그간 나름대로 자리를 잘 잡았다고 생각한다.”
출연연이 연합한 형태의 과학기술지주가 꼭 필요하나.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나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처럼 자체 기술지주회사를 가진 곳도 있는데.
“첨단 과학기술 분야 창업은 하나의 기술로는 어렵다. 실제로 딥테크 유니콘 기업(상장 전 기업가치 1조원)의 66%는 3개 이상의 기술이 바탕이 된다. 과학기술지주가 중심이 돼 여러 출연연의 기술을 묶는 기획 창업이 중요해지고 있다. 우리가 그간 투자한 142개 스타트업 중 성공한 곳의 비결을 분석해봤더니 기술 융합이 매우 중요한 성공 포인트였다. 이 때문에 최근 과학기술지주 내에 대형 기획 창업을 위한 본부를 만들었다. ETRI나 KIST가 초기 투자할 때 우리가 동반 투자해주거나 아니면 후속 투자해서 민간 쪽으로 이어지게 하는 역할도 해주고 있다.”

딥테크에 대한 지원 계속돼야

민간 투자사나 액셀러레이터들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지 않나.
“출연연 기술은 좀 무거운, 딥테크 창업이다. 성과를 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초기에 돈은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시장의 매력도가 떨어진다. 이 때문에 지주회사를 통해 특성에 맞게 창업을 도와주고, 성격에 맞는 펀드를 만들고, 키워줘야 한다. 철저히 시장논리로 접근하는 민간이 하기엔 어려운 부분이 있다.”
내년 R&D 예산이 많이 깎였는데, 투자 시장에도 영향을 미칠까.
“안타깝지만 당연히 그럴 것으로 본다. 출연연과 대학에서 나오는 딥테크·딥사이언스 창업은 기술 실증 등 소위 죽음의 계곡을 넘어 제대로 성장하기까지 지원이 많이 필요한데, 내년 R&D 예산은 새로운 연구 분야로 몰릴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