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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코리안 프로메테우스

중앙일보

입력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영화 ‘오펜하이머’는 새롭고도 낯익다. 과학과 정치, 두 날개를 달았다. 오펜하이머가 책임지고 개발한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지고, 일본이 마침내 항복하자 트루먼 대통령이 그를 불러 치하한다. 더 연구에 매진하라고 독려한다. 오펜하이머는 주저한다. “지금 제 손에 피가 묻은 느낌”이라고 대답한다. 트루먼이 반박한다. “누가 투하 명령을 내렸나요. 당신이 책임질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시한다. “징징대는 애들은 이 방에 들이지 마.”

어디서 본 듯한 영화 ‘오펜하이머’
‘원폭의 아버지’ 둘러싼 색깔 논쟁
이념의 늪에 다시 빠진 한국 사회

 ‘오펜하이머’는 쉽지 않은 영화다. 양자역학, 미국·독일·소련의 원폭 경쟁, 오펜하이머의 일과 사랑 등이 세 시간 동안 빽빽하게 맞물린다. 그 한복판에 공산주의자 논쟁이 있다. 괴짜 물리학자 오펜하이머의 전기이자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진단서다. 영화를 본 뒤 각본집을 따로 읽으며 전체 흐름을 되짚어보기도 했다.

 영화의 원작은 2006년 퓰리처상을 받은 오펜하이머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다. ‘원자폭탄의 아버지’에서 ‘반역자’로 내몰린 오펜하이머를 인류에 불을 선물한 대가로 신의 벌을 받은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했다. 수소폭탄에 반대한 이유로 공산주의자로 몰리고, 소련 스파이로 의심받은 오펜하이머의 청문회 장면이 얘기를 끌고 간다. 1954년 공산주의자 낙인이 찍힌 오펜하이머는 68년 만인 지난해 말에야 스파이 누명에서 벗어났다.

 오펜하이머는 문제적 인간이었다. 과학자이면서도 스페인 내전의 공화파를 후원했고, 고대 인도경전 『바가바드 기타』를 산스크리트어로 읽었다. 피카소 그림을 좋아했고 T S 엘리엇의 ‘황무지’를 열독했다. 아내·동생 등이 미국 공산당에 적을 두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박제된 이념에 반대했다. 영화 초반 나오는 대사 한 토막.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자유로운 사고가 필요해요. 왜 하나의 도그마에 자신을 가두려고 하죠?”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공저자인 카인 버드는 영화 각본집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펜하이머는 1950년대 마녀사냥의 가장 큰 희생자다. 1633년 갈릴레오가 로마교회 재판정에서 모욕을 당한 것처럼. (…) 미국 사회가 정치와 과학에 대해 솔직하게 토론할 능력을 손상당했다는 점이 오펜하이머의 진짜 비극”이라고 주장했다.

 일면 이해도 된다. 1950년대는 미·소 냉전이 본격화한 시기다.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 대립이 극에 달했다. 한반도에서도 김일성의 남침에 따른 6·25 비극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예나 지금이나 존재감이 극도로 미미한 미국 공산당을 앞세워 한 천재 과학자를 무너뜨린 시대의 광기는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요즘 한국 사회도 때아닌 이념 전쟁으로 어지럽다. 그 발신지가 윤석열 정부의 용산이라는 점에서 당혹스럽다. 북한의 핵무기를 머리에 이고 사는 시점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경각심은 필수적이지만 홍범도 장군 등의 항일 독립운동을 소련·중국 공산당에 연결하고, 현 정부 비판 세력을 공산 전체주의로 규정하는 건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다. 1970년대 반공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든다. ‘코리안 프로메테우스’라도 만들자는 것일까.

 윤 대통령의 언어는 비장하고 직설적이다. 또 갈수록 강도가 세지는 느낌이다. 대통령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대신 ‘새는 날아가는 방향이 같아야 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21세기 다원화 사회에서 ‘같은 방향’은 자칫 또 다른 전체주의를 부를 수 있다. 말 그대로 ‘철 지난’ 이념 분열을 부추길 수 있다.

 왜 지금 공산주의를 연일 비토할까. 그만큼 시대가 위태롭다는 걸까, 아니면 국정에 대한 자신감 부족일까. 단 하나는 분명하다. 민심은 흩뜨리는 것보다 봉합하는 게 훨씬 어렵다. 핵분열(원자폭탄)보다 핵융합(수소폭탄)이 고난도인 것과 같다. 보수·진보는 둘째 치고 그간 누누이 강조해 온 공정과 상식, 자유와 실용 두 날개부터 제대로 펼칠 일이다.

글=박정호 수석논설위원 그림=임근홍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