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안 개구리」정책/최철주 경제부장(데스크의 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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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줄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 우물안 개구리라고 부른다.
19세기 말에는 개화파 인사들이 수구파를 그렇게 일컬었다. 수구파들은 서양의 산업화나 한반도 주변 열강의 각축이 무슨 대수냐는 생각을 하며 쇄국정책을 썼다. 문만 닫아 놓으면 아무나 함부로 우리를 건드릴 수 없을 것으로 여겼다.
최근 브뤼셀에서 우루과이라운드(UR) 최종협상을 위한 세계 각국의 각료회담이 열리고 있을 때 서울에서는 민자당이 『외국 상품은 사지도 팔지도 않는다』는 내용이 담긴 팸플릿을 뿌렸다. 기가 찰 일이다. 비록 당원용으로 배부되는 소책자이긴 하나 그처럼 소견머리 없는 주장이 어떻게 집권당의 이름으로 활자화되어 나올 수 있는지 어안이 벙벙하다. 도대체 지금이 어느 시대인가.
우루과이라운드를 어렵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여러나라 사람들이 서로의 국경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물건을 사고 팔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새로운 규칙을 정하자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의 일상생활이 한층 국제화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나라가 세계 제13대 교역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적지 않은 상품을 외국에서 팔거나 사들였기 때문이다. 덩달아 우리들의 살림살이도 꽤 늘어났다.
집권당이 「새 질서·새 생활 이렇게 실천하자」면서 덥석 「외국상품 불매운동」을 펴는 것은 자칫 국산품의 수출길을 막아 사실상 민간경제 활동을 마비시킬 위험 천만한 일이다.
농민단체나 소비자단체가 UR협상에 따른 외풍을 우려해 「국산품 애용」캠페인을 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야당의원들이 UR가 타결되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사실을 오도하고 이에 질세라 여당이 외국상품을 쓰지말자고 공공연히 주장하는 것을 보면 정치경륜이나 국제감각을 묻기에 앞서 아직도 우리가 그런 수준이구나 하는 생각에 낯이 뜨거워진다. 이러다간 척화비라도 세우자는 의견이 나올지도 모른다.
정치권은 그들이 선거를 통한 경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찾듯 우리나라 경제가 외국과의 시장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UR대응방안을 제시했어야 한다.
경제에 대한 우리들의 논리는 때때로 너무 조잡해서 그게 결국 우리들의 발목을 욱죄고 있다.
전체 국민의 부담은 따지지 않은 채 추곡수매가는 그저 대폭 올려야 하고 농어촌 부채는 많이 탕감해야 하며 UR협상은 단연코 거부해야 한다는 식이다. 다분히 인기영합적인 주장이 경제정책을 뒤틀리게 했으며 또 지금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경제에서 예상되는 모든 부작용을 아예 부정하거나 모르는체 하고 한 방향으로만 정책을 밀어 붙이는 사고정지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3공은 77년 부가가치세제를 다룰 때 국무회의에서 『이 문제에 대해 각하의 결심이 있으시다』는 말로 이의를 제기치 못하도록 했다. 세리를 늘리고 세리의 부정을 없애는 가장 좋은 제도라는 이유에서 였다.
5공은 82년에 실명제를 도입하려다 그 여파로 금융시장이 왜곡되고 부동산값이 뛰자 원점으로 되돌아섰다. 취지는 좋았으나 부작용이 너무 컸다.
87년에 6공은 다시 실명제 도입을 공약했다가 금년에 또 좌초되는 쓴맛을 보았다. 그것은 정권에 치명적이었으며 자업자득이었다. 6공은 경제부문 업적으로 뭔가 남길게 없을까 하고 궁리끝에 예의 실명제를 덥석 끌어냈다가 한판 당하고 말았다. 사고가 정지된 상태에서 정책이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보다 치밀한 단계적 검토가 있었더라면 그런 대소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정부는 에너지 가격에 너무나 손을 많이대 석유류 가격이 턱없이 싸졌다. 지난 82년이래 금년 3월까지 내리 10차례나 가격을 인하해 왔다. 모두가 싼 에너지 가격에 길들여졌다. 그래서 소비 증가율은 늘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문제는 경제논리가 무시되고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값을 떨어뜨려 왔다는데 있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정치권도,행정부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93년 대전 세계박람회가 얼마나 많은 무리속에 추진되고 있는가를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우리의 경제실력으로는 정말 벅찬 일이었다. 그러나 정부가 상식을 뒤엎을 만큼 그 계획을 「과감」하게 밀어붙인 결과 세계의 공인까지 받았다. 이제는 이미 저질러 놓은 일이니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 정부와 기업·국민이 땀을 뺄 수 밖에 없다.
이와 함께 경부고속전철사업이 6공의 「공적」으로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우선 순위에 대해서는 많은 이견이 쏟아지고 있다.
또 하나 있다. 소련과의 외교관계 수립의 「대가」로 어떤 방식,어떤 규모외 경제협력이 이루어질 것이냐 하는 것이다. 경협이라는 정치적 결정을 지배하는 변수는 국가경제 이익추구와 인도주의,이념 등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소 경협이 6공의 기념비적이고 과시적인 프로젝트로 다루어져서는 안된다.
이제는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머리가 굳어진 사고정지형 정치인이나 관료는 자신의 다음 거취를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 UR는 우리 모두에게 창의력을 요구하고 있고 다양성과 국제적응 능력을 갖도록 강요하고 있다.
지금은 집권당마저 외국상품 불매운동을 벌일 시대는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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