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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진중권 칼럼

뉴라이트 운동권이 된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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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진중권 광운대 교수

진중권 광운대 교수

“제일 중요한 것이 이념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말이다. 어느 사회에나 실없는 소리 하는 이들이 있기 마련이나 그 말을 한 이가 하필 대통령. 그 덕에 21세기 디지털 선진국이라는 나라의 분위기가 졸지에 1970년대 개발도상국 시절로 되돌아가 버렸다.

도대체 무슨 사변이 일어난 걸까? 이념에 빙의된 머릿속에선 현실이 사라지고 대신 망상이 들어서는 법. “공산전체주의 세력, 그 맹종 세력과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들은 허위조작, 선전 선동으로 자유 사회를 교란시키려는 심리전을 일삼고 있으며….” 대체 공산전체주의 세력이 누구일까? 대답하지 못할 게다. 그 세력은 그들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니까. 공산전체주의 세력에게 십자군 전쟁을 선포한 대통령.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거인을 물리치겠노라고 풍차로 돌격하는 돈키호테를 본다.

“제일 중요한 것은 이념” 선언
마치 개도국 시절 돌아간 느낌
헌법에서도 벗어난 이념 회귀
공동체의 약속 함부로 흔드나

이 매카시즘 선동의 고전적 효용은 이런 것이다. “공산 전체주의 세력과 기회주의적 추종 세력, 그리고 반국가 세력은 반일 감정을 선동하고, 캠프 데이비드에서 도출된 한미일 협력 체계가 대한민국과 국민을 위험에 빠뜨릴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여기서 약소국의 가치외교는 들러리 서다 덤터기나 쓰는 일이며, 전략적 명확성은 제 카드를 미리 내보이는 미련한 짓이며, 한미일 협력 체계 안에서 한국이 일본의 종속변수로 전락하게 된다고 믿는 이들은 졸지에 ‘공산전체주의 세력’이 된다. 겁먹을 건 없다. 지금이 70년대도 아니고, 아무리 이념 깡패들이 설쳐대도 대한민국 국민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보호를 받기 때문이다. 걱정되는 것은 대통령이 “나라를 제대로 끌고 갈 수 있는 그런 철학”이라 부른 ‘이념’, 즉 뉴라이트 사상이다.

징조는 삼일절 때부터 보였지만 뉴라이트 사관이 전면화한 것은 지난 광복절 경축사 때부터였다. 말이 ‘광복절 축사’이지 내용은 거의 6·25 기념사. 교묘히 감추어 놓긴 했지만, 그 축사의 핵심은 대한민국이 1948년에 ‘건국’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니 독립운동가 흉상 철거는 예고된 수순. 문제가 되자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홍범도만 치우겠다지만, 원래 계획은 좌익과 관계없는 독립운동가들의 흉상까지 다 치우는 것이었다. 즉, 국가공동체의 기억에서 독립운동사를 아예 지우려 한 것이다. 뉴라이트 사관에 따르면 해방은 전적으로 미군의 선물이라 독립운동이 기여한 바 없고, 일본의 식민통치는 미개한 조선인을 개화시켜 조선에 근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런 일본에 저항했으니 독립운동은 사실 망국의 길이었다는 얘기. 위안부나 징용공과 같은 역사문제, 오염수 방출과 같은 환경 문제를 놓고 일본을 비판하면 이른바 ‘반일종족주의’의 발로로 치부된다. 그로써 실존하는 우리의 이해관계는 민족 감정이 빚어낸 허구로 그냥 증발해 버린다. 그러니 퍼주기만 하는 수밖에.

요직의 곳곳에 전진 배치된 극단분자들. 대통령이 온통 이 보수의 이단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정치권 밖에서 들어온 인사라 어떤 결핍은 처음부터 우려했던 바나, 그 공백을 하필 뉴라이트 사상으로 채우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대통령은 지금 자기가 오른쪽 극단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이럴 때 제 이념적 위치를 알아보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냥 제 오른쪽을 보라. 거기에 아무도 없다면, 자기가 극우라는 얘기다. 지금 대통령보다 더 오른쪽에 누가 있는가. 박정희 대통령도 홍범도 장군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박근혜 정권도 ‘홍범도 함’을 진수했다. 홍준표 시장, 김태흠 도지사 같은 보수인사, 대부분의 보수지도 홍범도 흉상의 철거에 반대한다. 대통령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대통령의 그 ‘이념’은 헌법을 벗어났다.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그런데 독립운동사를 지우고 4·19가 끌어내린 이승만 동상을 다시 세우는 세력을, 대통령이 나서서 편든다.

‘자유’와 함께 대통령이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낱말이 ‘법치’다. 대통령이 수호해야 할 최고의 법은 헌법이다. 헌법은 온 국가공동체의 약속이자 공통의 기억이다. 한 개인이나 세력이 멋대로 고쳐 쓸 게 못 된다.

헌법이 맘에 안 들면 개정해 다시 쓰든지. ‘대한민국은 공산 비적을 토벌한 간도특별대의 법통, 이승만 정부의 3·15 선거 정신, 5·16혁명과 유신헌법으로 성장의 토대를 닦은 박정희 정권, 12·12 혁명의 빛나는 구국 이념을 계승하고….’  국가라는 건물에 5년짜리 세를 놨더니, 세입자가 들어와 70년대식 판잣집을 짓겠노라고 공들여 지은 건물을 허문다. 왜? 듣자 하니 그게 다 총선 전략이란다. 어이가 없다. 보수마저 갈라치는 게 과연 선거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진보와 보수를 넘어 상식과 공정의 나라를 만든다기에 당선시켜줬더니, 그 약속을 깨고 국가 정체성을 흔들어댄다. 그 좋은 기회를 왜 이렇게 허망하게 날리는 걸까?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진중권 광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