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성추행 작가" vs "개인작품 아냐"...임옥상 조형물 철거 논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5일 오전 서울시 중구 남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추모 공원(기억의 터)에 있는 민중미술가 임옥상씨 조형물 ‘대지의 눈’과 ‘세상의 배꼽’이 철거됐다. 이 터는 1910년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데라우치 마시다케(寺內正毅) 통감이 ‘한일병합조약’(경술국치조약)을 체결한 통감 관저가 있던 자리다. 이 공간은 서울시가 2016년 조성했다.

5일 민중미술가 임옥상 조형물 철거 

 5일 오전 서울 중구 남산 기억의 터에 설치된 원로 민중미술가 임옥상 화백의 조형물 '세상의 배꼽'이 중장비로 철거되고 있다. 뉴스1

5일 오전 서울 중구 남산 기억의 터에 설치된 원로 민중미술가 임옥상 화백의 조형물 '세상의 배꼽'이 중장비로 철거되고 있다. 뉴스1

이들 작품은 지난달 임씨가 여직원 강제 추행 혐의로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으며 철거 여론이 일었다. 반인륜적 전쟁범죄 피해자를 기리는 공간에 성범죄 가해자 작품을 둘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서울시는 이날 오전 6시 15분부터 포클레인 한 대와 대형 트럭 세 대를 동원해 이들 작품을 철거했다. ‘대지의 눈’ ‘세상의 배꼽’을 끝으로 임씨 작품 6점이 공공영역에서 모두 사라지게 됐다.

당초 전날 철거할 계획이었으나 정의기억연대(정의연) 등 여성 단체의 반발로 철거하지 못했다. 정의연 등은 조형물 위에 평화를 상징한다는 보라색 천을 두르고 중장비 투입을 막았다. 현장엔 ‘위안부 지우기 중단하라’ 등 문구가 적힌 피켓도 등장했다. 이날은 새벽부터 경찰과 시청 관계자 100여명이 ‘기억의 터’ 출입로 5곳을 통제했다.

정의기억연대와 여성단체 회원들이 지난 4일 오전 중구 남산 기억의 터에 설치된 원로 민중미술가 임옥상 화백의 조형물 '대지의 눈' 앞에서 서울시의 철거 방침을 규탄하고 있다. 뉴스1

정의기억연대와 여성단체 회원들이 지난 4일 오전 중구 남산 기억의 터에 설치된 원로 민중미술가 임옥상 화백의 조형물 '대지의 눈' 앞에서 서울시의 철거 방침을 규탄하고 있다. 뉴스1

정의연 등 반발에 하루 밀린 철거 

임씨 작품 철거를 계기로 ‘작가=작품’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그동안 대체로 철거 쪽에 기울었다. 2018년 성추행 의혹에 휩싸인 시인 고은씨가 대표적이다. 성추문 의혹 제기 이후 경남 창원 국립 3·15 민주묘지 돌에 고씨 시를 새긴 작품 ‘김용필’ 등이 철거됐다. 경북 포항시도 시청사 1층과 2층 계단 사이 벽면에 걸렸던 시 ‘등대지기’를 덧칠해 지웠다. 이 시도 고은 작품이다. 서울시도 서울도서관(옛 서울시청사) 3층에 꾸민 고씨 기념공간인 ‘만인의 방’을 없앴다.

또 교수로 재직하며 제자를 상습 성추행한 사진작가 배병우씨 작품도 국립경주박물관 등에서 사라졌다. 전남 순천시는 문화의 거리 내 ‘배병우 창작스튜디오’를 폐쇄했다.

5일 오전 서울 중구 남산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에 위치한 '대지의 눈' 철거 현장에 임옥상 작가의 이름이 적힌 조각이 남아있다. 연합뉴스

5일 오전 서울 중구 남산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에 위치한 '대지의 눈' 철거 현장에 임옥상 작가의 이름이 적힌 조각이 남아있다. 연합뉴스

"'대지의 눈' 등은 개인작품 아냐" 

하지만 이번에 철거된 임씨 작품은 ‘집단 창작물’인 만큼 남겨뒀어야 했단 의견도 있다. 정의연에 따르면 ‘대지의 눈’엔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순덕 할머니가 그린 작품 ‘끌려감’과 할머니 한 분 한 분의 생애와 증언이 새겨져 있었다. ‘세상의 배꼽’엔 여성주의 화가 윤석남 그림과 함께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문구가 담겨 있다. 더욱이 ‘기억의 터’ 조성엔 시민 1만9745명이 모금을 통해 동참했다.

정의연은 5일 성명을 내고 “서울시가 철거한 ‘대지의 눈’과 ‘세상의 배꼽’은 임옥상 개인 작품이 아니다”라며 “임의 성폭력과 일본군 위안부 역사를 모두 기록하고 기억할 수 있는 방안을 공론의 장을 통해 (철거 전) 먼저 마련하자고 제안했으나 (서울시는) 결국 철거로 답했다”고 주장했다.

"위안부 피해자 기리는 새 조형물 설치할 것" 

이와 관련, 오세훈 서울시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위안부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단체가 성추행을 인정한 작가의 작품 철거를 (4일) 막아섰다”며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오 시장은 “많은 시민 단체가 같은 사안을 두고 ‘우리 편’이 하면 허물을 감싸주고 ‘상대편’이 하면 무자비한 비판의 날을 들이댄다”며 “진영논리가 아닌 상식과 시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시민운동이 필요하다”고 썼다.

한편 서울시는 철거된 ‘대지의 눈’ 등을 대신해 위안부 피해자를 제대로 기릴 수 있는 조형물을 설치할 방침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