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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판타지 속 판타지를 찾아서 68화. 염제, 신농

중앙일보

입력

왜 가을 아닌 여름의 신이 농사를 관장할까

오랜 옛날, 사람들은 산과 들을 다니며 먹을 것을 찾았습니다. 나무에서 열매를 따고, 산에서 짐승을 잡아먹으며 하루하루를 살았죠. 풍요로운 자연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먹거리를 전해주었고, 힘들긴 해도 부족하지 않게 살 수 있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산과 들의 먹거리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조금만 다녀도 배불리 먹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온종일 다녀도 충분하지 않게 되었죠.

명나라 때 화가 곽후(郭詡)의 그림(1503)에서 풀을 씹으며 약효를 시험하는 염제. 이 같은 농경신 덕분에 우리는 가을에 풍요로운 수확을 얻을 수 있다.

명나라 때 화가 곽후(郭詡)의 그림(1503)에서 풀을 씹으며 약효를 시험하는 염제. 이 같은 농경신 덕분에 우리는 가을에 풍요로운 수확을 얻을 수 있다.

그 무렵 사람들을 다스리는 염제라는 신이 있었습니다. 소 머리에 인간의 몸을 한 반인반수의 신 염제는 굶주리는 백성들을 보며 고민했어요. ‘어떻게 하면 이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을까?’ 괴로워하던 염제가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마침 붉은 깃털의 새 한 마리가 날아다니는 게 보였습니다. 새는 염제를 보고 놀란 듯 입에 물고 있던 무언가를 떨어뜨렸죠. 염제가 가보니 아홉 개의 이삭이 달린 곡물 줄기가 있었습니다. 그 정체는 바로 벼였죠. 염제가 이를 주워 씨앗을 땅에 뿌리자, 오래 지나지 않아 싹이 피어오르고 씨앗이 맺히기 시작했어요. 염제는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었고, 사람들이 이를 따라 하자 각지에서 수많은 벼가 자라 굶주리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농사에 얽힌 중국 신화인데요. 벼의 씨앗을 땅에 심어 농사를 짓는 방법을 알려준 염제 이야기는 사람들이 본래 사냥과 채집 중심으로 살다가 농경을 하며 번성하게 된 역사적 사실을 떠올리게 하죠. 농사나 곡물과 관련한 신의 이야기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각지의 신화에서 찾을 수 있어요. 대부분은 중요한 신으로 여겨집니다. 마야·아스텍 신화에서는 이들 사회의 가장 중요한 식량이었던 옥수수의 신이 최고 신의 자리에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도 옥수수로 만들어졌다고 할 정도죠. 실제로 농사가 시작된 후 대다수 사람은 쌀·밀·옥수수 같은 곡물을 주식으로 살았으니 우리 몸이 곡물로 이루어졌다고 말해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모든 곳에서 농사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에요. 몽골에는 목축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며, 북극권처럼 추운 지역에선 지금도 사냥만으로 생활하죠. 하지만 세계 인구를 생각할 때, 그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염제 이야기에서 봤듯 사냥이나 채집, 또는 목축만으로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는 없기 때문이죠. 이는 판타지 세계에서도 다르지 않아요. ‘반지의 제왕’ 속 엘프처럼 숲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이들이나, 흡혈귀처럼 다른 이의 피나 생명에너지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 인구를 지닌 문명이라면 자연의 먹거리만으론 충분하지 못할 것입니다. 당연히 농사를 짓고, 곡식을 거둬 빵이나 밥 같은 식사를 준비하겠죠.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과연 마법과 신의 힘이 존재하는 판타지 세계의 농사는 우리 세계의 농사와 같을까요. 물론 우리와 똑같이 씨앗을 심고 물과 비료를 주어 곡식을 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법이 중요한 판타지 세계에선 농부들이 아니라 마법사들이 마법의 힘인 마력을 사용하여 농사를 지을 수도 있죠. 농사의 신이 있고 그 신의 축복이 중요하다면, 농사에서 중요할 때마다 신관들이 논과 밭에 파견되어 기도하는 장면을 보게 될지도 모르죠.

이처럼 마력이나 신의 힘으로 작물이 자란다면, 농사에 물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사막에 황금빛 밀밭이 펼쳐지고, 북극에서 사과가 열리며, 심지어는 바닷물 위에서 쌀이 자랄 수도 있겠죠. 우리 세계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농촌 모습이 펼쳐질 수 있습니다. 판타지 세계의 농사는 우리의 그것과 얼마든지 다를 수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우리 세계의 농사가 우리 세계에서 중요한 영양분을 공급하는 원천이듯이, 판타지 세계의 농사도 그 세계에 중요한 무언가를 공급하는 원천이라는 것이죠. 신화 속 마야인들이 그들에게 소중한 옥수수나 옥수수를 이루는 무언가로 만들어졌듯, 판타지 세계 사람들 역시 야채나 곡식을 통해 그들에게 중요한 무언가를 얻어서 자라날 것입니다.

중국에서 인간에게 농사를 알려주었다는 염제는 신농이라 불리며, 불의 신이자 여름의 신, 그리고 의학의 신이기도 한데요. 벼농사를 통해 사람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한 염제는 이를 통해 풀과 나무에 관심을 지니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천지를 다니며 다양한 풀과 나무를 맛보며 사람에게 이로운지 해로운지 살폈다고 하죠. 자연의 산물을 통해 병을 치료하고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방법, 한의학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자연의 기운을 받아 작물이 자라나며, 우리가 이들을 먹으면서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했어요. 수확의 계절인 가을을 담당하는 신이 아니라 여름의 신 염제가 농사를 맡게 된 것도 벼 같은 작물이 더운 여름의 기운을 받아서 자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가을은 바로 여름의 기운, 염제라는 신의 기운을 받아 자라난 작물을 수확하는 시기입니다. 판타지 같은 작품에선 사냥이나 채집처럼 자연의 산물을 그대로 이용하는 것을 좋은 생활 방식이라 이야기해요. 하지만 인간의 노력을 바탕으로 염제 같은 신의 기운이 담긴 작물을 재배하는 농사야말로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신비한 생활 방식이 아닐까요.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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