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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을 죽여 원숭이에 경고한다…프리고진 의문사, 푸틴 노림수 셋

중앙일보

입력

프리고진 의문사로 본 ‘암살 공작’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달 23일(현지시간) 쿠르스크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쿠르스크 승전 80주년 기념행사에서 참석자들의 환호에 손을 들어 답하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달 23일(현지시간) 쿠르스크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쿠르스크 승전 80주년 기념행사에서 참석자들의 환호에 손을 들어 답하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제정러시아부터 옛 소련과 러시아까지 이어져온 국가 비밀 기관이 최고 지도자의 정적과 배신자를 은밀히, 또는 대놓고 제거하는 공작을 일컫는 ‘능동적 시책’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바그너그룹의 실질적 운영자인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지난달 23일 의문의 비행기 추락 사고로 숨지면서다.

프리고진은 지난 6월 23~24일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가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의 중재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타협한 뒤 용병들을 철수시켰다. 당시 무장 반란 소식을 접한 푸틴 대통령은 분노한 표정으로 프리고진을 ‘반역자’로 부르는 비디오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바그너그룹 용병들이 수도 모스크바의 턱밑까지 치고 올라오자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절대적 권위에 손상을 입은 푸틴 대통령이 언제라도 보복에 나설 것이란 예상이 적지 않았다.

프리고진이 탑승한 비행기 추락 이후 서방에서 푸틴 대통령의 공작일 것이란 평가가 나돌자 드리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거짓말”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대신 ‘보복설’ ‘공작설’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가고 있다.

실제로 러시아어로 ‘악티브니 메로프리야챠(активные мероприятия)’로 불리는 ‘능동적 시책’, 즉 암살 공작은 오랫동안 옛 소련과 러시아에서 최고 지도자들의 권력 유지 수단으로 애용돼 왔다. 만약 이번 사건이 비밀공작에 의한 것이라면 푸틴 대통령은 왜 21세기 대명천지에 이런 낡은 수법을 동원한 것일까.

주목할 점은 추락한 제트기에는 프리고진 외에도 바그너그룹 공동 창설자이자 작전 책임자인 드미트리 우트킨과 군수·보안 책임자인 발레리 체칼로프 등 용병 기업 수뇌부 일곱 명과 승무원 세 명이 탑승했고 이들 전원이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이번 추락으로 프리고진뿐 아니라 바그너그룹의 심장부가 몰살한 셈이다. 이후 푸틴 대통령은 바그너그룹에게 충성 서약을 요구하는 명령을 내렸다. 일시적으로 푸틴의 통제 밖에 나가려고 했던 바그너그룹이 다시 푸틴의 통제 아래로 들어온 것이다. 이에 대해 타임지도 “푸틴 대통령이 다시 권력을 완전 회복했다”고 평가했다.

유로뉴스도 전문가들과 함께 이번 사태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파고들었다. 러시아 비정부 사회연구기관인 레바다 분석센터의 데니스 볼로코프 위원은 “푸틴 대통령 입장에선 권력과 대중 지지, 그리고 동원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을 가진 최고 지도자가 누구인지를 자국 엘리트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곧 프리고진 응징을 통해 하나로 100을 경계하고 엘리트들에게 겁을 줘서 함부로 움직이게 못하게 하는 ‘살계경후(殺鷄儆猴·닭을 죽여 원숭이에게 경고함)’의 정치술이다. 힘을 숭상하고 권력자를 겁내는 러시아 풍토에서 ‘공포감’이야말로 대중을 통제하고 행동을 제약하는 최고의 수단이란 얘기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은 무장 반란 직후인 지난 6월 29일에도 북카프카스 다게스탄 공화국을 찾아 환호하는 대중에 둘러싸여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공개했다. 푸틴이 공식 행사 자리가 아닌 곳에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매우 이례적이다. 푸틴의 이런 행동은 러시아의 정치·경제 엘리트들에게 ‘국민 지지’를 받는 유일한 최고 지도자가 누구인지를 잊지 말라는 신호를 보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프리고진

프리고진

공교롭게도 프리고진이 탑승한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소식이 전해질 무렵에도 푸틴 대통령은 대중과 만나고 있었다. 러시아 중서부 쿠르스크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쿠르스크 전투 8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해 우크라이나 전투에서 공을 세운 군인들에게 직접 훈장을 걸어주고 환호하는 대중에 둘러싸여 연설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대 러시아연구소의 안나 마트베예바 박사는 “현재 우크라이나 최전선의 전황을 보면 바그너그룹 용병이 그리 절실히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우크라이나가 대대적으로 전선을 돌파하지 않는 한 푸틴이 바그너그룹에 목맬 필요가 없는 상황이란 얘기다. 무장 반란으로 충성심에 의문표가 붙게 된 데다 전황상 용병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자 푸틴도 바그너 제거를 결심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필요하면 잘 대우하다 이용 가치가 떨어지면 가차없이 내치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의 또 다른 사례라는 주장이다.

유럽 민간단체인 유럽회복계획센터(ERIC)의 세르게이 숨레미 연구위원은 푸틴 대통령이 세 가지를 보여주려고 했다고 분석했다. 첫째는 푸틴에게 양보를 받아낼 생각을 하지 말 것과 그에게 대들면 어떻게든 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이너서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측근 부하도 얼마든지 응징할 수 있다는 메시지다. 셋째는 충성심이나 능력이 떨어져 이용 가치가 떨어지는 지휘관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숨레미 위원은 최고 지도부가 이처럼 폭력을 권력 유지와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쓰게 되면 러시아 사회 전체에 폭력을 조장하고 이를 유용한 수단으로 정당화하는 태도가 확산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폭력은 더 많은 폭력을 부르고 더 나아가 전쟁범죄까지 조장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뉴욕타임스도 푸틴이 아무리 ‘효율성’이 있어도 ‘불충’은 용서할 수 없다는 신호를 엘리트들에게 보낸 것으로 풀이했다.

러시아 입장에서 볼 때 프리고진은 바그너그룹에서 복무할 용병을 감옥 등에서 끌어모은 뒤 우크라이나에 몰아넣어 전선을 방어한 공로가 크다. 니제르·수단·리비아 등 아프리카 곳곳에도 용병을 보내 쿠데타나 내전 등에 개입하며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에 공헌해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푸틴은 이번에 ‘능동적 시책’ 카드를 다시 꺼내 들면서 프리고진이 보여준 이런 ‘잔혹한 효율성’ 대신 ‘충성심’을 이너서클의 최대 덕목으로 제시한 셈이 됐다. ‘포스트 프리고진 시대’에 푸틴식 통치가 어떻게 전개될지 예고해 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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