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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 안정” vs “소득보장 강화”…해묵은 갈등에 정식안 못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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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5호 04면

국민연금 개혁 시나리오 공개

국민연금 5차 재정계산위원회가 끝내 제대로 된 재정안정방안을 내지 못하고 18개 시나리오를 던져놨다. 일부 안이 현실성이 높아 보일 뿐 정식 개혁안으로 내세운 게 아니다. 지난해 8월부터 수십명의 전문가가 1년가량 매달렸지만 확실한 안을 만들지 못했다. 재정재계산을 시작한지 25년간 이런 적은 없었다. 1~4차 때 2~3개 방안을 냈다. 4차 때는 재정계산위의 방안을 정부가 받지 않았고, 소위 ‘사지선다’ 안을 국회에 제출한 후 손도 안 댔다. 김태일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는 “재정계산위가 이번에 부담감 때문에 너무 눈치를 본 것 같다”며 “전문가 위원회는 정치적 부담이 없기 때문에 바람직한 개혁안을 압축해 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2018년 문재인 정부 시절 4차 재계산 때 조금이라도 고쳤으면 이번에 부담이 덜했을 터다. 그냥 지나는 바람에 기금 고갈 시기가 2057년에서 2055년으로 2년 당겨졌다. 기금이 사라진 후 그해 연금을 지급하는 데 필요한 보험료가 34.9%(최고 기준, 4차 때는 29.7%)로 치솟았다. 출산율은 0.7명대로 떨어졌고 고령화와 인구감소 속도는 더 빨라졌다. 경제성장률도 향후 70년 평균이 4차 재계산 때 1.1%에서 이번에는 0.7%로 나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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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 재정계산위는 이런 악조건을 안고 출발했다. 그나마 성과로 볼 수 있는 게 ‘2023~2093년 적립기금이 소진되지 않게 한다’는 목표를 세운 점이다. 지금처럼 초저출산이 유지되면 2060년 소득의 34.3%를 보험료로 내야 그해 연금을 지급할 수 있다. 2070년부터는 소득의 42%를 내야 한다. 소득의 약 절반을 보험료로 낼 수는 없다. 후세대에 이런 상황을 떠넘기지 않게 ‘향후 70년 튼튼’이라는 목표를 세운 점은 평가할 만하다. 현 세대가 더 부담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담겼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현행 보험료는 소득의 9%다. 25년째 요지부동이다. 18%로 올려도 2093년 기금 고갈을 막지 못한다. ‘보험료 18%’를 받아들일 사람도 없다. 그래서 재정계산위는 연금수급개시 연령(현재 63세, 2033년 65세)을 68세로 늦추고, 기금운용수익률을 0.5에서 1%포인트 올리는 안을 동원했다. 신종 기법이다. 그런데 12%로는 ‘70년 튼튼’ 목표 달성이 불가능하다. 3개 변수 최대치(12%+68세+1%P)를 조합해도 2080년 고갈된다.

다음 후보는 보험료 15% 안(6개)이다. 이 중 최대치 조합 시나리오(15%+68세+1%P)만 ‘70년 튼튼’ 목표에 부합한다. 그러면 2093년 그해 연금지급액의 8.7배가 남게 된다. 김용하 재정계산위원장(순천향대 IT금융경영학과 교수)은 “국민 부담을 최소화할 수 있는 안”이라고 한다. 다르게 해석하면 유력안이라는 말이다. 올 초 국회 연금개혁특위 산하 민간자문위원회에서 보험료 15% 방안에 어느 정도 접근했다. 김태일 교수는 “보험료를 15%로 올리는 게 바람직하다”며 “정부가 10월 국회에 개혁안을 제출할 때 15%를 담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이근면 전 인사혁신처장은 “보험료를 올리면 기업 부담이 커져 경쟁력이 떨어진다”며 “기존 수급자의 연금지급액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주명룡 대한은퇴자협회 회장은 1일 공청회에서 “내가 받고 있는 연금 일부라도 반환하고 싶다”며 “미래 세대가 확실하게 연금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줘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급 수급 개시 연령을 68세로 늦추는 데 대해 전문가들은 우호적이다. 다만 지금도 50대 중반에 은퇴해서 연금을 받기까지 10년가량 소득 공백이 있는데, 이를 더 늘리기가 쉽지는 않아 보인다. 이 전 처장은 “더 늦은 나이에 받고 더 오래 일해서 보험료를 내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태일 교수는 “2048년에 68세로 늦추려는 것은 그리 무리한 것은 아니다”며 “그 때까지 고령자가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번 시나리오에 기금수익률 변수를 넣은 걸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1%P를 높이면 기금 고갈을 5년가량 늦춘다. 김태일 교수는 “수익률을 올리려면 주식 같은 위험자산 투자 비중을 늘려야 한다”며 “위험성이 커진다는 데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의미”고 말한다. 연금 기금은 4년마다 통계적으로 마이너스 수익률을 내왔다. 지난해 -8.22%를 기록하면서 80조원 평가 손실을 냈다.

연금개혁 방안을 둘러싼 해묵은 갈등이 이번에도 이어졌는데, 앞으로도 계속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재정안정이냐, 소득보장 강화(소득대체율 상향)냐가 그것이다. 4차 계산 때는 재정안정 전문가가 사퇴했고, 이번에는 소득보장 강화파가 그리했다. 2015년 공무원연금 개혁 직후 문재인 당시 더민주당 대표가 “보험료를 1%P만 올려도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50%로 올릴 수 있다”고 말한 이후 두 그룹이 대립해 왔다. 올해 소득대체율은 42.5%이며 2028년 40%로 내려간다. 2007년 노무현 전 대통령 연금개혁의 핵심이다.

소득보장 강화 그룹은 이번 재정계산위원회에서 ‘보험료 13%-소득대체율 50%’ 안을 내세웠지만 누적적자가 외려 늘어난다는 반박에 부닥쳤다. 참여연대는 지난 31일 정책 요구안을 통해 “(크레딧 확대 등으로) 가입기간을 늘리는 방안은 군복무나 출산을 이미 경험한 가입자 다수에게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며 “소득대체율을 50%로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소득대체율을 올리면 생각보다 연금 증액 효과가 그리 크지 않다. 효과도 한창 후에 나타난다. 그래서 재정계산위원회는 저소득 가입자 지원, 군복무·출산크레디트 확대, 저소득 노인에 기초연금 집중 등을 제안했다.

이제 공은 정부로 넘어갔다. 보건복지부는 1일 “보험료 15%, 68세 안은 정부안이 아니다”라며 선을 그었다. 총선을 7개월 여 남긴 상황이라서 부담감이 클 수 있다. 이스란 연금정책국장은 “개혁에 있어 합리성도 중요하지만 국민 설득과 수용성도 중요한 과제”라며 “소득대체율 부분도 언급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보험료 12%’ 카드를 꺼낼 수도 있다. ‘70년 튼튼’ 대신 ‘50년 튼튼’ 안으로 단계적으로 가는 방안이다.

김설 청년유니온 위원장은 이날 공청회에서 “지체된 개혁이 연금에 대한 불신을 지속적으로 키웠다”며 “지난 정부들같이 건강검진(재정재계산)만 하고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행태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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