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중앙시평

우리가 기대어온 세 축이 흔들리고 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금년이 광복 78주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75주년이다. 이 짧은 기간 동안 한국은 최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했다. 지금의 50대 중반 이상은 후진국 어린이로 태어나 중진국 어른으로 직장을 다녔고 이제 선진국 시민으로 은퇴기를 맞게 되었다. 서구의 3세기에 걸친 경제사회적 변화-산업화, 도시화, 민주화, 세계화, 디지털정보화-를 단 한 생애에 겪으며 살아온 사람들은 아마 지금의 한국인들이 유일할 것이다. 이런 격변을 겪어오면서 어떻게 개인이나 사회의 내면이 평화로울 수 있었겠는가? 그것도 내생적 변화가 아니고 소나무에 마로니에 나무를 접목하듯 해온 제도의 단절과 변화를 감당하면서. 우리 사회는 그 갈등과 스트레스로 그동안 끓는 솥 뚜껑처럼 들썩여 왔다. 그런 힘든 과정을 거쳐오면서도 오늘과 같은 도약을 이룬 것은 큰 역사적 성취이다.

지금의 국제, 정치, 시장질서 변화
광복 후 78년간 겪은 변화에 버금
21세기 남은 78년 번영 위해서는
권력구조, 보상체계 재정비해야

문제는 앞날이다. 이러한 도약을 이루게 된 데에는 대한민국이 자본주의, 민주주의를 추구해왔고, 또 자유주의 질서를 주도해온 세계 최강국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맺어 온 것이 결정적 힘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세 축이 모두 불안정해지고 있다.

자본주의는 지난 한 세기 큰 시련을 겪으며 변화해 왔다. 반복적 금융위기, 소득분배 악화와 경제공황을 겪으면서 공산주의 혁명과 확산을 가져왔고, 1930년대 이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애틀리 총리가 정부 역할과 시장규제 강화, 복지국가를 지향하면서 수정된 형태로 존속해 왔다. 1980년대 다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영국의 대처 총리가 신자유주의로 방향을 틀었고, 이 정책 기조는 진보적 정당인 클린턴의 민주당, 블레어의 노동당에서도 계승되었다. 이후 약 30여년에 걸친 자유화, 개방화, 세계화와 더불어 세계교역과 해외투자는 크게 확대되고 새로운 공급망이 형성되며 중국과 신흥국 경제의 빠른 부상을 가져왔으나 소득분배는 크게 악화했다. 트럼프 정부는 이 방향을 다시 틀었다. 대중의 정서를 간파한 트럼프의 탈 세계화, 미국 우선주의, 대중 견제, 보호무역주의로의 선회는 바이든의 민주당 정부에서도 거의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보다 제도화하고 세련되게 포장했을 뿐이다. 이제 개방적 다자간 질서는 무너지고, 신보호주의, 미·중 간의 줄 세우기, 각자도생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민주주의 역시 지난 한 세기 큰 실질적 변화를 겪어왔다. 지식, 재산, 성별과 관계없이 모든 성인이 1인 1표를 행사하는 보통선거제가 실시된 것은 아직 한 세기도 되지 않는다. 영국에서 1928년, 미국에서 1936년이었다. 이런 민주주의가 인터넷, 디지털 혁명과 결합하면서 의사소통방식, 여론형성 과정이 변화하며 국가정책의 질이 떨어지고 있다. 정치토양이 바뀌고 정치인은 더 이상 대중과 여론을 이끄는 리더가 아니라 점점 일시적 여론의 추종자, 포퓰리스트가 되고 있다.

중국의 부상은 탈아입구(脫亞入歐)를 표방한 과거 일본의 부상과 다르다. 탈아도 아니고 입구도 아니고 중국식 발전과 굴기이며 서양의 패권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중국경제의 미래에 대해 최근 부정적 시각이 많이 나오고 있지만, 미중 경쟁에서 누가 궁극적 강자로 부상할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지난주 잭슨홀 미팅에서 발표된 논문들은 미국의 대중 견제 정책이 의도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분석했다. 관세장벽, 수출통제, 투자제한은 공급망 체계를 복잡하게 해 수입비용만 증가시킬 뿐 중국제품에 대한 미국의 실질적 의존도를 줄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수입처가 멕시코나 인도, 동남아 국가로 전환되고 있으나 이들 국가의 중국 부품 수입과 산업의존도는 크게 늘어나 우회적으로 중국 제품을 수입하고 있으며 우방국들의 경제를 중국에 더욱 밀착하게 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멕시코에 대한 자동차부품 수출은 지난 5년간 배로 증가했다.

우리가 기대어온 이 세 축에 변화가 일어나면서 이미 세상의 지각은 변동하기 시작했다. 지난 78년간 대한민국은 갈등하는 가운데서도 분투하며 성공했다. 이제 21세기의 남은 78년을 대한민국이 이 세 축의 변화에 어떻게 대응해 항해할 것인가에 국가번영의 길이 달려있다. 민주주의, 자본주의는 많은 한계를 가진 제도이나 아직 세상은 이를 대체할 더 우월한 제도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민주주의, 자본주의도 여러 형태를 띨 수 있다. 결국 국가사회 고유의 환경과 역사적 전통을 고려하면서 시대변화에 따른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 제도로의 보완을 모색해야 한다. 5년 단임제로 극히 단기화한 우리 사회 전반의 시계(視界)를 넓히고 시대가 요구하는 혁신을 제때 이뤄낼 수 있는 국가지배구조로의 개편, 잠재성장률의 빠른 하락을 막고 안정적 균형 성장을 지속할 수 있기 위한 우리 사회 보상체계와 정부기관들의 역할 재정비, 변화하는 지정학적 판세에서 통일과 장기적 국익을 위한 대외정책 방향의 정립을 위해 우리 언론·학계·정계에서 보다 깊은 토론이 일어나야 할 시점이다.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