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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예고글 236명 검거했는데…"장난이었다" 한마디면 무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살인예고 글 관련 판례가 적고, 직접 적용할 법률이 없는 상황이라….”(경찰청 살인예고 글 수사 관계자)

초유의 살인예고 글 범람 사태를 직면한 경찰 등 당국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작성자를 속속 잡아들이고 있지만, 이들을 실제 처벌받도록 하기 위해선 넘어야 할 장애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사이버수사국은 29일 오전 9시 기준 살인예고 글 관련 479건을 수사 중이다. 이 가운데 229건에 연루된 236명이 경찰에 검거됐다. 이 중 23명은 구속됐다.

현행법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범죄를 예고한 행위를 처벌하는 규정을 따로 두고 있지 않다. 경찰이 작성자들에게 협박죄, 살인예비죄, 위계공무집행방해죄 등을 궁여지책으로 적용한 이유다. 경찰청 관계자는 “새로운 법이 제정되지 않는 한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 7일 기자간담회에서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관계자는 “새로운 판례 형성을 하겠다는 각오로 적극 수사하겠다”고 말했다. 엄벌기조를 밝힌 것이지만 그만큼 작성자를 처벌하기가 쉽지 않다는 속내가 담긴 말이기도 했다.

우종수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이 6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열린 전국 시도청 수사 부장·차장 살인예고글 관련 긴급 화상회의에 참석했다. 사진 뉴스1

우종수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이 6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열린 전국 시도청 수사 부장·차장 살인예고글 관련 긴급 화상회의에 참석했다. 사진 뉴스1

처벌 규정을 둘러싼 딜레마적 상황은 법원에서도 재연되고 있다. 지난 25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3단독 양진호 판사는 서울 신림동에서 여성 20명을 죽이겠다는 글을 올리고, 길이 32.5cm 흉기를 주문한 혐의(협박·살인예비·정보통신망법 위반)로 구속기소 된 이모(26)씨의 첫 공판을 열었다. 이씨는 신림역 흉기난동 사건 이후 우후죽순 쏟아진 살인예고 글을 썼다 체포된 첫 인물이다.

쟁점이 된 건 협박죄 성립 여부였다. 양 판사는 협박죄와 관련 “협박성 표현이 도달하는 상대방이 있어야 하는데, 게시글을 본 사람들에 대한 협박은 법리적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글을 직접 보지 않은 신림역 인근 상인 등은 기사로 알게 됐을 것 같다”며 “검토가 필요하다”고 검찰에 의견서 제출을 요청했다. 협박죄가 성립하려면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이 특정인에게 도달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으로, 첫 재판부터 사실관계가 아니라 법 적용이 가능한지를 두고 제동이 걸린 것이다.

살인예고글에 대한 협박죄 적용을 두고 상·하급심 판단이 달라진 경우도 있다. 조현병을 앓던 A씨는 2015년 1월 ‘X’(옛 트위터)에 “박근혜 대통령 삼성동 자택 폭파 예정”이라는 글을 작성하고, 저격수가 총을 겨누는 사진 등을 총 6회 올려 박 전 대통령과 자택 관리인을 협박한 혐의로 기소됐다. 1심 법원은 이를 유죄로 인정해 A씨에게 징역 8개월을 선고 했다. 다만 2심 법원은 일부 게시글이 피해자에게 도달했는지 증명되지 않았다고 보고 혐의를 협박미수로 변경해 징역 6개월로 감형했다.

신림역에서 여성을 살해하겠다고 예고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린 이모(26)씨가 지난달 27일 오후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신림역에서 여성을 살해하겠다고 예고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린 이모(26)씨가 지난달 27일 오후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마친 뒤 법원을 나서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살인예비죄는 더 까다롭다. 범행 실현 의사뿐 아니라 준비, 실행 착수 등이 구체적으로 입증돼야 한다. 그런데 검거된 작성자 대다수는 “장난으로 불특정 다수 살인을 예고하는 글을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소영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은 “법원 판단을 지켜봐야겠지만, 협박죄와 살인예비죄의 통설과 대법원 판례를 고려할 때 유죄 판결을 끌어내기가 쉽진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수사기관은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죄 적용에 기대를 걸고 있다. 위계공무집행방해죄는 허위 사실로 공무원을 속여 직무를 방해할 경우 성립한다. 수원지검 형사3부(부장검사 김성원)는 “용산 칼부림 예고 없죠”라는 제목의 온라인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며 지하철역에서 칼부림을 할 것 같이 발언한 B씨(21)를 위계공무집행방해죄로 25일 구속기소했다.

실제 허위 살인예고 글을 온라인에 게시해 경찰력 투입 등 행정력을 낭비했다는 이유로 유죄를 인정한 사례도 있다. 2015년 1월 울산지법은 “오늘 밤 8시 기장에서 칼로 30명 죽이고 송정해수욕장에서 50명 죽일 거다”라는 등 스포츠토토 사이트에 살인 예고 글을 총 13회 게시한 혐의(위계공무집행방해·정보통신망법 위반)로 기소된 C씨에 대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당시 사이트 운영자의 신고에 경찰관 200여명이 해운대 일대를 4시간 동안 수색하는 동안에도 C씨는 자택에서 흉기 사진을 첨부한 살인 예고 글을 게시하고 있었다.

4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구 오리역에서 경찰특공대가 순찰을 하고 있다. 경찰은 ‘서현역 묻지마 흉기난동’ 사건 후 온라인 공간에서 또 다른 ‘오리역 살인예고’ 글이 작성되자 성남시 분당지역에 인력 98명을 긴급배치 했다. 사진 뉴스1

4일 오후 경기 성남시 분당구 오리역에서 경찰특공대가 순찰을 하고 있다. 경찰은 ‘서현역 묻지마 흉기난동’ 사건 후 온라인 공간에서 또 다른 ‘오리역 살인예고’ 글이 작성되자 성남시 분당지역에 인력 98명을 긴급배치 했다. 사진 뉴스1

이에 국회에선 ‘공중 협박죄’ 입법이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지난 16일 홍석준 국민의힘 의원은 정보통신망법 일부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은 불특정 다수의 생명과 신체에 위해를 가하려는 내용을 정보통신망에 유포하거나 게시해 공중의 공포심이나 불안감을 유발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독일은 온라인 살인예고를 일종의 혐오범죄로 규정하고 처벌한다. 독일 정부는 지난 2021년 4월 형법을 개정해 온라인상 협박에 대한 처벌 범주를 넓혔다. 살인 협박뿐 아니라 성 정체성 등에 대해 모욕과 협박을 하는 경우 2년 이하 징역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 해당 개정안은 표현의 자유 위축 우려가 있었지만, 2019년 할레(Halle)와 2020년 하나우(Hanau) 지역에서 극우주의자가 SNS에 살인을 예고하고 테러를 생중계한 사건이 발생한 이후 통과에 급물살을 탔다.

미국에선 불특정 다수를 향한 ‘허위 협박(Hoax Threats)’ 행위를 강하게 처벌하고 있다. 미 연방 형법은 타인을 해하겠다고 협박하는 내용을 통신 수단을 통해 전송하는 이를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 미 연방수사국(FBI)이 공개한 사례에 따르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학교나 공공장소에서 총기를 난사하겠다는 글을 게시한 이들이 주로 붙잡혔다. 청소년도 징역형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FBI는 2018년 ‘게시 전에 생각하세요(ThinkBeforeYouPost)’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SNS에 허위 총기 난사 협박을 올렸다 체포된 대학생을 홍보 주인공으로 내세워 허위 협박 범죄의 심각성을 경고하는 등 허위 협박을 줄이려 애쓰고 있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허위 협박' 행위는 처벌될 수 있다는 캠페인을 2018년 시작하고, 허위 협박으로 체포된 대학생을 홍보 모델로 세워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영상에서 허위협박범은 "순간의 행동으로 미래가 불투명해졌다"고 후회했다. FBI 유튜브 캡처

미 연방수사국(FBI)은 '허위 협박' 행위는 처벌될 수 있다는 캠페인을 2018년 시작하고, 허위 협박으로 체포된 대학생을 홍보 모델로 세워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영상에서 허위협박범은 "순간의 행동으로 미래가 불투명해졌다"고 후회했다. FBI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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