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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디지털 새 판 짜기, 결국 답은 ‘창의성’에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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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재민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재민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996년 10월 마이클 잭슨의 첫 서울 공연이 있었다. 화려한 공연은 예상치 못한 파장을 불러왔다. 세금 문제다. 200만 달러의 공연 수익에 우리 정부가 세금을 부과할 수 없었다. 마이클 잭슨이 서울에 아무런 물적 시설 없는 ‘히스토릭 투어’란 법인 명의로 ‘몸만 와서’ 공연한 까닭이다. 1976년 한미 조세조약에선 이 경우 과세할 근거가 없다. 문워킹의 감흥은 잠실경기장에 가득했지만 우리 영토에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시설은 없었다. 결국 세금을 매기지 못했다. 2007년 6월 또 다른 유명가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서울 공연도 비슷했다. 그 후 원천징수 등으로 이 경우 간접적으로 과세하는 방법을 어찌어찌 찾았으나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하다.

최종 단계 접어든 디지털세 논의
OECD 성공은 창의적 해법 결과
글로벌 디지털 새판짜기 과정서
성공 관건은 결국 ‘상자 밖 생각’

마이클 잭슨은 서울에 오기라도 했다. 아예 여기 오지도 않은 기업이나 사람은 이제 어쩔 것인가. 과거엔 이 전제 자체가 불가능했다. 오지 않곤 돈 벌 방법이 없었다. 더는 아니다. 지금은 디지털 시대. 서울행 없이도, 서울에 사무실이 없어도 돈을 번다. 어젯밤만 해도 얼마나 많은 우리 국민이 넷플릭스를 보고 유튜브를 켰을까. 그럼 이들 ‘해외’ IT 기업들이 우리 국민에게서 번 돈에 어떻게, 어디까지 세금을 매길 것인가. 그간의 국내법이나 조약으론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 우리뿐 아니라 여러 국가의 고민이다. 세금을 내라는 나라와 왜 자국민에 부당한 세금을 매기냐며 반대하는 나라가 맞선 지 오래다.

이 문제에 대한 대타협이 이뤄졌다. 2021년 10월의 일이다. 프랑스 파리 소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주요 20개국(G20) 노력의 결과다. 그 후 2년에 걸쳐 후속 작업이 진행돼 새로운 국제 조세 제도가 시행 길목에 있다. 우리나라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금 이 합의에 참여한 국가는 138개국이다. 의미 있는 경제활동을 하는 국가 거의 전부라는 뜻이다. 합의에 디지털이란 이름은 없지만 주된 대상은 IT 기업 또는 연관기업이다. 이 세금이 ‘디지털세’, ‘구글세’라 불리는 이유다.

디지털 기업들은 이제 돈을 번 곳에 일정 부분 세금을 낸다. ‘서울에 온 적 없다’, ‘사무실이 없다’는 게 더 이상 방패가 되지 않는다. 또한 들쭉날쭉한 각국 법인세율 차이와 상관없이 전 세계적으로 최소 15% 법인세는 어쨌든 낸다. 법인세율 낮은 나라에 클라우딩 서버를 두고 낮은 세금만 죽 내는 걸 견제하게 되었다.

지금 진행 중인 각국 국내법 개정과 관련 조약 발효가 2024~25년 순차적으로 마무리되면 국제 조세 제도는 근 100여년 만에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우리 역시 국제조세조정법을 개정해 내년 1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일단 15% 글로벌 최저한세부터 시작한다.

국제사회의 조세 형평은 차치하고 OECD 합의는 여러모로 중요한 제도적 함의가 있다. 그간 디지털 분야에선 여러 논의만 무성했지 다자간 합의에 이른 건 이게 처음이다. 특히 미국, 중국, 독일, 프랑스 등 주요국이 합의에 이른 건 주목할 만하다. 이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 OECD에선 성공했을까. 다른 데선 끊임없이 다투고 있지 않나.

이런 게 달랐다. 먼저 조용한, 그러나 체계적인 물밑 작업이다. 요란한 소리만 내는 다른 국제기구들과 달리 OECD는 조용하다. 시나브로 성과를 낸다. 디지털세도 2015년 작업 개시 이후 지난 8년간 소리소문없는 잰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2019년, 2020년 하나씩 목표점을 통과하더니 2021년 10월엔 최종 합의까지 갔다. 그 후 2년은 후속작업이 촘촘히 이어졌다. 팬데믹이 무색하다.

탄탄한 기초 공사는 고정관념 타파를 가능케 했다. 국가 간 대립도 첨예하나 분명 공통분모도 있다. 이를 정리해 가려운 데를 긁어 주었다. 기존 조약·국내법 틀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창의적 해법을 찾았다. 국내법에 넘길 것과 조약에 담을 것을 나눈 역할 분담은 대표적이다. 국내법도 중구난방 흩어지는 걸 막고자 안전장치를 두었다. 모델 조항과 해설서를 만들어 각국 국내법을 한 방향으로 모은다. 개도국을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메커니즘도 여럿 만들었다. 특히 138개국이 이미 체결한 2500여개에 이르는 조세조약을 손쉽게 개정하는 새로운 방식도 포함됐다. 전례 없는 시도들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세금이란 민감한 쟁점에 여러 국가를 합의로 이끈 데는 이러한 창의적 접근이 결정적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완벽하진 않지만 국제사회가 어려운 시기에 중요한 성공 방정식의 일단을 보여주었다.

지금 디지털 분야 다양한 논의가 국제사회에서 활발하다. 인공지능, 개인정보, 데이터 이전 등 모두 하나같이 어렵고 민감하다. 기존 제도와 시스템이 생각지 못한 쟁점들이다. 이들 글로벌 디지털 현안에서 국가 간 이견을 조율해 구체적 성과를 내는 건 결국 ‘창의적’ 해법을 어떻게 찾느냐에 달려 있다. OECD의 조용한 성과는 이를 보여준다. 우리가 기여할 가능성도 바로 여기다.

이재민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