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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통 우크라보다 열차 느려졌다…'유럽 맏형' 獨에 무슨 일 [세계 한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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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열차는 폭격 속에서도 제 시간에 도착하는데, 독일 열차는 연착은 물론 한밤중에 내리게 했다.

 독일 국영 철도회사 도이체반(DB)의 고속열차가 지난 8일 독일 서부 도르트문트 차고에 서 있다. AFP=연합뉴스

독일 국영 철도회사 도이체반(DB)의 고속열차가 지난 8일 독일 서부 도르트문트 차고에 서 있다. AFP=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작가 스타니슬라브 아세예프가 이달 초 소셜미디어(SNS) X(옛 트위터)에 올린 글의 일부다. 독일 국영 철도회사 도이체반(DB) 계정을 링크하고 쓴 이 글에서 그는 "지난해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날 수도 키이우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나오는데, 주변의 모든 것이 불타고 연기에 휩싸여도 열차는 제시간에 도착했다"면서 "그런데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독일 함부르크까지 장거리 열차를 탔는데 1시간 30분 늦게 오더니 돌연 독일 국경 부근에서 내리라고 해 거리에서 밤을 보냈다. 승객에게 이보다 무례한 철도 회사는 본 적이 없다"고 적었다. 

이 글은 약 110만회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한 네티즌은 아세예프의 글에 SNS에서 화제가 된 DB를 희화화한 '밈(인터넷 유행 콘텐트)'을 올리면서 "DB 로고 사진을 거꾸로 돌리면, 비명을 지르고 있는 승객이 보인다"고 했다.

"DB사장조차 열차에 따라 시계를 다시 맞추라고 하더라", "DB는 자사 구직자가 연착때문에 면접에 늦게 왔다고 하면 뭐라고 말할지 궁금하다", "연착에 대해 변명으로 일관하는 DB는 끔찍하다" 등 DB에 대한 불만이 담긴 글이 많이 올라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달 초 "DB의 이런 모습은 꼼꼼한 계획과 시간 엄수의 나라로 유명한 독일에게 문화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독일 국영 철도회사 도이체반(DB)의 로고를 거꾸로 뒤집은 모습이 담긴 밈이 소셜미디어(SNS)에서 화제가 됐다. 마치 승객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사진 X 캡처

독일 국영 철도회사 도이체반(DB)의 로고를 거꾸로 뒤집은 모습이 담긴 밈이 소셜미디어(SNS)에서 화제가 됐다. 마치 승객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사진 X 캡처

정시율 68%…노후된 인프라 원인

지난 1994년 동·서독 국영철도를 통합해 탄생한 DB는 한때 열차 95% 이상이 정시 운행했다. 그런데 약 10여년 전부터 시간을 잘 지키기 못하기 시작했다. 특히 장거리 열차의 정시률이 뚝 떨어졌는데, 지난해는 65.2%로 10년 만에 최악의 기록을 세웠다. 

5~10분 늦는 건 기본이고, 2~3시간 지연도 많다. 너무 연착되면 결행되기도 한다. 지난해 연착에 대한 보상액 규모가 9270만 유로(약 1355억원)에 이르렀다. 올 상반기 정시률은 68.7%인데, 7~8월 성수기에 유독 연착이 심해지고 있어 올해 연간 정시율은 지난해보다 더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독일 rbb24방송은 DB 열차가 연착되는 가장 큰 이유로 노후된 인프라를 꼽았다. 독일 비영리 운송연맹 프로레일연맹에 따르면 독일은 지난해 철도망 투자에 1인당 114유로(약 17만원)를 지출했다. 룩셈부르크(575유로), 스위스(450유로), 노르웨이(346유로), 오스트리아(319유로) 등보다 크게 떨어졌다. 지난해 독일에선 철도 선로가 겨우 74㎞가 신설됐다. 각종 도로는 약 1만㎞가 건설됐다. 슈피겔은 "수십년동안 독일에선 철도보다는 도로 건설이 선호됐다"고 지적했다.

혼잡한 철도 네트워크도 문제다. 유럽에서 가장 큰 철도운영사인 DB는 독일 국경과 맞대고 있는 스위스·덴마크·오스트리아 등과 연결하는 장거리 열차와 독일내 단거리 열차 등 광범위한 범위를 커버한다. 이에 열차는 계속 늘어나는데 선로 확장은 되지 않고, 스위치·신호상자 등 주요 장치는 절반 가까이가 결함이 있는 상태다 보니 교통체증이 생기고 정시율이 떨어졌다.  

임광균 송원대 철도경영학과 교수는 "한국은 일반·고속열차 노선이 분리되어있어 정시률이 높은 편이지만, 독일은 일반·고속·화물열차 등 다양한 열차가 같은 선로를 쓰고 있어 선로용량(선로 하나에 하루 동안 운행할 수 있는 최대 열차 횟수)이 부족해 정시성이 좋지 않다"고 설명했다. DB 장거리 승객 운송을 담당하는 마이클 피터슨 이사도 "한 선로를 일반·고속·화물열차 등이 전부 사용하는 현 체계에선 시간 엄수를 99% 지킬 수 없다"고 지적했다. 

정비 인력 없고, 해외 사업 주력 

DB는 지난 2008년 부분 민영화 이후 인력 감축 등 구조 조정을 단행했다. 그런데 비용 절감을 위해 철도 관리 비용도 줄이면서 자격을 갖춘 정비 인력이 없어 개보수가 느려졌다. 

해외 진출에 몰두한 게 문제라는 시각도 있다. 지난 3월 독일 감사원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DB경영진은 그동안 물류사업과 같은 비철도 사업에 주력하고, 국내 철도 투자엔 소홀하고 해외 사업 확장에 주력했다. DB는 전세계 130개 이상 국가에 700개 이상 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매년 손실이 최소 10억~12억 유로(약 1조5000억~1조7000억원)인데도 경영진은 상여금 잔치을 벌이고,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도 잦아 여론의 눈총을 받고 있다. 

한 독일인이 지난 5월 독일 베를린에서 한달에 49유로를 내면 근거리 대중교통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도이칠란드 티켓을 보여주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한 독일인이 지난 5월 독일 베를린에서 한달에 49유로를 내면 근거리 대중교통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도이칠란드 티켓을 보여주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에너지 위기와 인플레이션 문제가 심각해지자, 독일 정부는 지난 5월 매달 근거리 대중교통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49유로(약 7만원) 티켓를 발매했다. 

그러자 승객은 늘어났고, 연착에 대한 불만은 한층 커졌다. 이로 인해 최근 스위스 철도망에서 독일 열차가 배제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스위스 열차의 정시율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다. 베를린 사회과학센터(WZB)의 안드레아스 크니 교통정책 교수는 "DB의 이런 모습은 가장 효율적인 나라라고 자랑하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에게 당혹스러운 일이고 독일 전체의 문화적 위기"라고 강조했다.

독일, '유럽의 병자' 될 가능성  

시간 엄수가 안 되고 노후화된 DB는 현재 약화하고 있는 독일 경제의 단면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17일 유럽 최대 경제 대국인 독일이 다시 '유럽의 병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독일의 올해 2분기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전 분기 대비 0%(속보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4분기(-0.4%)와 올해 1분기(-0.1%) 연속 마이너스 성장에 이어 2분기에도 제자리걸음을 했다. 경제 침체의 이유로 독일 GDP의 20%를 차지하는 제조업 경기 부진으로 떨어진 수출 경쟁력, 고령화에 따른 숙련된 근로자 부족, 중국과 러시아에 과도하게 의존한 부분 등이 꼽힌다.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독일 베를린자유대의 김상국 역사문화학 교수는 "여러 가지 지표가 독일 경제에 빨간불이 들어왔다는 걸 보여준다"면서도 "현지에선 그다지 나쁜 상황이라고 느끼지 않는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독일 정부도 침체하는 경제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해 DB와 같은 공공 인프라를 개선하고, 우크라이나 난민 일부를 3D 업종에 취업시키는 등 인력 수급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독일에서 10여년 넘게 거주했던 김호균 명지대 경영정보학과 명예교수는 "중·러와 미국 사이의 갈등, 우크라이나 전쟁 등 복잡한 국제관계 여파가 독일 경제에 타격을 입혔지만, 쉽게 무너질 나라가 아니다"라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면 제조업 강국인 독일이 재건의 주축이 되면서 빠르게 회복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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