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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프리즘] 한여름 밤의 꿈, 50년 주담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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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4호 30면

황정일 경제산업에디터

황정일 경제산업에디터

“없어지기 전에 받아야 하는데…” 어느 날 오후 한 친구가 전화를 하더니 뜬금없이 대출 이야기를 꺼냈다. 대출이 필요하면 받으면 되지, 뭐가 문제냐고 했더니 ‘담보’를 결정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이따금 어디의 어느 아파트가 좋을지 상의하던 A라는 친구다.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로 집을 사려는데 이른바 결정장애가 온 것이다.

가계대출 증가에 금융당국 압박
금융권, 50년 주담대 연령 제한

A의 결정장애는 사실 하루 이틀 된 게 아니다. 집값이 하락하면 늘 고민에 빠진다. 집값이 내렸으니 집을 사야 할 것 같기는 한데, 더 내릴 것 같다며 고민에 고민에 고민만 거듭하다 날을 새웠다. 그런데 A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결의에 차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사려나 보다, 생각하던 순간 의문이 들었다. 지난해부터 서울·수도권을 중심으로 집값이 꽤 많이 올랐다. 그간 A의 고민 패턴과는 맞지 않았다.

그를 고민에 빠트린 건, 아니 또다시 내 집 마련의 꿈을 꾸게 한 건 ‘반백년 대출’로 불리는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이었다. 주담대는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은 물론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를 받기 때문에 차주(돈 빌린 사람)가 매년 갚아야 하는 원리금 상환액이 소득의 일정 비율을 넘길 수 없다. 하지만 대출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매달 갚아야 하는 원금이 줄어 대출 한도가 늘고 월 상환액이 줄어든다.

A가 그동안의 패턴과 다르게 집값이 오르고 있는데도 집을 사겠다고 나선 것도 그래서다. 실제로 50년 주담대는 인기가 많았다. KB국민·신한·하나·NH농협 등 4개 은행이 50년 주담대 판매를 시작한 지난달 9일부터 이달 14일까지 1조7490억원이 판매된 것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갑자기 수요가 몰리면서 탈이 났다. 가계대출 급증에 놀란 금융당국은 금융권에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금융당국은 50년 주담대가 가계대출을 억제하기 위한 DSR의 우회 통로라고 보고 있다. 정부의 압박에 은행·보험사 등 50년 주담대 취급 금융사는 연령 제한을 걸기 시작했다. 카카오뱅크는 25일부터 34세 이하에만 50년 주담대를 팔기 시작했다. Sh수협은행도 이달 안에 34세 이하로 제한할 방침이다. NH농협은행은 아예 이달 말 판매를 종료할 예정이고, BNK경남은행도 50년 주담대를 28일 잠정 중단키로 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7월 기준 은행권 가계대출 잔액은 1068조1000억원이다. 사상 최대치다. 전 세계가 여전히 ‘긴축모드’여서 금융당국의 걱정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금융권을 상대로 50년 주담대를 찍어 누르는 건 얼른 이해하기 어렵다. 가계대출 증가세는 부동산 시장의 문제이지, 50년 주담대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가계대출은 50년 주담대 등장 이전, 부동산 시장에 온기가 돌기 시작한 지난해 말부터 이미 증가세였다.

40년, 30년 주담대는 두고 50년에만 연령 제한을 두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은행권에 따르면 30~40년 주담대를 받아도 만기까지 유지하는 예는 거의 없다. 실수요자는 좀 더 넓거나 새집으로 갈아타기 위해서, 투자자는 집값이 오르면 상환하는 게 일반적이다. 연령 제한의 실효성이 없을 뿐 아니라 형평성 차원에서도 맞지 않는다.

해외에서는 긴축모드에 원리금 상환 부담이 커지자 주담대 기간을 늘리는 추세다. 주택금융공사가 전국의 20세 이상 가구주 5000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8~9월 실시해 올해 초 공개한 ‘2022년 주택금융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가구주의 44.4%는 초장기 주담대를 선호했다. 대출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갚아야 할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긴 하지만 ‘매월 원리금 상환액 부담이 줄기 때문’(53.4%)이다. 가계대출이 불어나면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금융당국의 설익은 행보에 내일모레면 50대가 되는 A의 내 집 마련은 또다시 한여름 밤의 꿈으로 끝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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