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국 의료기술 최고, 이젠 환자 안전 관리에 집중해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54호 28면

이왕준 의료의질향상학회 회장

이달 27~30일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의료질향상연맹 세계총회 준비를 맡은 이왕준 한국의료의질향상학회 회장. [사진 명지병원]

이달 27~30일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의료질향상연맹 세계총회 준비를 맡은 이왕준 한국의료의질향상학회 회장. [사진 명지병원]

‘환자 안전 주의 경보! 환자에게 수액 주입 전 유효기간 확인 필요!’

지난달 11일 전국에 발령된 환자안전 경보이다. 민방위 훈련 사이렌처럼 울리지는 않지만, 전국 병의원과 의사·간호사 등의 의료인, 약사에게 온라인과 팩스·공문 등 다양한 형태로 퍼진다.  환자안전 보고학습시스템(KOPS)을 운영하는 의료기관평가인증원의 중앙환자안전센터에서 발령한다. 경보에는 실제 사고가 적시돼 있다. 10대 소아 환자가 복통·설사·미열 등으로 수액(생리식염수) 주사를 맞았다. 그런데 아이 부모가 수액의 유효기간이 46일 지나간 사실을 발견했다. 다행히 큰 부작용은 없었다.

지난해 12월에는 ‘입원 후 섬망 발생 경보’를 발령했다. 입원 스트레스나 수술, 약물 등으로 인해 섬망(의식이 흐려지고 착각과 망상이 생김)이 발생할 때가 있는데, 60대 대장염 환자가 새벽에 4층 창문을 출입문으로 착각해 추락하자 경보를 발령했다. 다행히 3층 지붕에 떨어져 크게 해를 입지 않았다. 중앙환자안전센터는 경보를 발령하면서 위험 요인, 국내외 대처방안 등을 함께 보낸다. 유효기간이 석 달 남은 수액에 ‘우선 사용’ 스티커를 붙이거나 섬망 증세 선별법을 제시한다. 그러면 해당 병원뿐 아니라 전국 의료기관이 문제점 개선에 나서고 결과를 KOPS에 등록한다.

경보가 발령된 안전사고는 의료기관이 자발적으로 신고한 것이다. 지난해 1만4820건이 보고됐다. 매년 증가한다. 쉬쉬하며 숨기기 바빴던 사고가 공개되고, 이게 개선의 재료가 돼 안전 강화로 이어진다. 구홍모 중앙환자안전센터장은 “지난 10여 년 전 환자 안전에 집중 투자한 결과,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 환자안전법(2015년 제정) 제정 이후 KOPS, 중앙안전센터 등의 종합세트를 갖춘 나라가 한국이 유일하다”며 “외국 학회에 발표하면 깜짝 놀란다”고 말한다. 구 센터장은 “10여년 간의 노력 끝에 왼쪽 무릎 관절을 수술해야 하는데 양쪽을 다하는 등의 황당한 사고가 많이 줄었다”고 덧붙였다.

의료든 재난이든 안전관리는 평소에 잘 보이지 않는 분야이다. 그러나 사고가 나면 충격이 크다. 2010년 ‘종현이 사건’은 의료 안전에 혁신을 가져왔다. 의료진이 급성림프구성백혈병 치료를 받던 정종현 군(9세)의 정맥에 주사해야 하는 빈크리스틴이라는 치료약을 척수강에 잘못 주사해 정 군이 사망했다. 종현이 엄마 김영희씨는 “다시는 종현이 같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아야 한다”며 제도 개선에 매달렸다. 그 결실이 환자안전 종합세트로 나타났다.

이달 27~30일 서울 코엑스에서 대규모 국제행사가 열린다. 국제의료질향상연맹 세계총회이다. 세계 72개국 1500명이 모여 환자 안전 기법과 대안을 제시한다. 2016년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열린다. 180명의 전문가가 발표 연자로 나선다. 보건 분야에서 세계보건기구(WHO) 총회 다음으로 큰 행사이다. 하이라이트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기조연설이다. 반 전 총장은 유엔의 가치와 환자 안전의 중요성을 강연한다. 이번 행사는 이왕준 한국의료의질향상학회 회장(명지병원 이사장)이 유치했고, 준비와 진행을 총괄하고 있다.

이 회장은 환자 안전분야 선구자이다. 2000년대 초반 미국 비영리의료기관 인증단체인 JC를 방문해 환자 안전 노하우를 수입했다. 그 결정체가 2010년 의료기관평가인증원 출범이다. 환자안전법 제정을 둘러싸고 이해충돌을 조율했다. 이 회장은 감염병 전문가이기도 하다. 신종플루(2009)·메르스(2015), 2020년 코로나 때 대한병원협회 비상대응본부장을 맡아 초기 대응을 지휘했다. 질병관리청 감염병 전문위원·자문위원을 가장 오래 맡은 전문가이다. 명지병원에서 민간병원으로는 처음으로 코로나 환자(3번 환자)를 받아서 완치했다. 다음은 이 회장과 일문일답.

서울총회의 의의는.
“한국 의료가 의학 기술뿐 아니라 질 관리 시스템과 환자 안전 관점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2019년 남아공 총회에서 두바이·터키 등 5개국과 경합 끝에 유치했다. 한국 세션에서 서울대·삼성서울·명지병원 등이 나서 한국의 혁신적 환자안전 체계를 발표한다.”
환자 안전이 그리 중요한 건가.
“한국은 의료기술이 최고이지만 이제는 소프트웨어, 즉 안전관리와 질적 향상에 집중해야 한다. 이건 한순간에 만들어지지 않는, 문화를 바꾸는 일이다. 21~26일 전국 300여개 의료기관이 병원 로비에서 환자들에게 박하사탕을 나눠주며 안전의 중요성을 알렸다.”
수술실에서 타임 아웃을 체크하고 있는 의료진들. [사진 명지병원]

수술실에서 타임 아웃을 체크하고 있는 의료진들. [사진 명지병원]

이 회장은 항공기의 안전수칙 ‘타임아웃’을 예로 든다. 얼마 전 항공기 비상문을 연 사고가 났을 때 승무원들아 신속하게 대응해 대형사고를 막았듯이 의료도 웬만한 병원은 수술실에서 ‘사인 인(Sign in)-타임아웃(Time out)-사인 아웃(Sign-out)’의 3단계 안전 절차를 시행한다. 환자 신원, 수술 부위, 각종 검사 자료를 이중삼중으로 확인하고 수술에 사용한 거즈·패드·바늘 개수가 준비한 것과 일치하는지 확인한다. 뱃속에 넣고 봉합하는 걸 막기 위해서다. 이 과정에서 집도의·마취의사·간호사 등이 “동의합니다” “확인했습니다”를 반복한다. 또 주사약 병 색깔을 다르게 하고, 수혈할 혈액형이 바뀌지 않게 두 사람이 교차 확인한다.

‘의료의 질’ 향상을 위해 고칠 게 있나.
“정부가 의료의 질을 평가해 지원금을 차등 지급하는데, 상대평가를 하는 게 문제다. 이렇게 하면 대형병원 몇 군데만 혜택을 본다. 모든 병원에 동기 부여를 하도록 개선해야 한다. 의료의 질 향상이 ‘열정 페이’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건강보험 재정(연 80조원) 중 1조원도 안 쓰는데, 네 배(5%)로 늘려야 한다.”

이 회장은 서울대 의대 시절 구학련(구국학생연맹) 사건에 연루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한 달간 수사를 받았다. 물고문 구타를 당했고 6개월 형을 살았다. 9년 만에 의대를 졸업, 외과전문의를 따고 1990년대 후반 인천사랑병원을 인수하면서 병원 경영자의 길로 들어섰다. 2009년 명지병원 이사장이 됐다. 원희룡 국토부 장관과 송영길 민주당 전 대표와 친하다. 두 사람이 이 회장 결혼 때 함을 들었다고 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