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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의사계정, 200만원 사요"…정보 캐려? 다른 이유 있다

중앙일보

입력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지난 21일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경찰청 직원 계정으로 ‘강남역 칼부림’ 예고 글을 올린 A씨가 경찰을 사칭한 30대 회사원으로 드러나면서, A씨가 경찰 계정을 갖게 된 경위에 대한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블라인드는 회사 이메일 주소나 재직 관련 서류를 통해 직장을 인증해야만 가입할 수 있다.

경찰과 업계 관계자 등에 따르면, 실제 직원이 아닌 사람이 특정 회사 계정으로 블라인드를 이용하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다. 돈을 주고 다른 사람의 계정을 사서 쓰거나,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인증절차를 피해 계정을 만드는 경우다. A씨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청 사이버테러수사대도 A씨가 경찰청 직원의 계정을 구입한 것인지, 혹은 인증을 피할 방법을 찾아내 직접 계정을 만들었는지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블라인드 계정 거래는 중고 거래 플랫폼이나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등을 통해 주로 이뤄진다. 실제 23일 오후에도 전문직ㆍ공무원ㆍ대기업 소속으로 가입된 블라인드 계정을 팔거나 사겠다는 글이 여러 건 올라와 있었다. 계정당 가격은 보통 5만~10만원에 형성돼 있었지만, 의사 등 일부 계정은 200만원까지 책정되기도 했다. 일부 글은 ‘거래완료’ 문구가 붙거나 오픈 채팅방 주소가 사라지는 등, 실제 거래가 이뤄진 흔적도 적지 않았다.

중고거래사이트와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 등에선 전문직,공무원,대기업 블라인드 계정 판매글이 상당수 올라와 있다. 독자 제공

중고거래사이트와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 등에선 전문직,공무원,대기업 블라인드 계정 판매글이 상당수 올라와 있다. 독자 제공

이렇게 구입한 계정은 주로 ‘이성과의 만남’에 쓰인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연애나 결혼에 있어 선호도가 높은 직업을 가진 것처럼 속이고 이성에게 접근하는 수단으로 블라인드 계정을 활용하는 것이다. 현대자동차에 근무하는 홍모(37)씨는 지난 2021년 블라인드 현대차 계정을 사겠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홍씨는 “킹차갓무직(현대차 사무직을 칭찬하기 위해 만들어진 신조어)라는 말이 떠돌 때였다”며 “계정거래를 통해 신분을 위장하고 이성을 만나려는 의도로 보였다”고 말했다. 경찰을 사칭한 A씨 역시 범행 전 ‘누드사진 찍어보고 싶은 훈남 경찰관이다’ ‘친구비 월 20만원 줄 테니 만나서 놀자’ 등의 게시글을 올리기도 했다. 조건만남 등의 범죄에 쓰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블라인드 경찰청 계정으로 강남역에서 흉기난동을 예고한 A씨는 과거 경찰청 계정을 통해 조건만남을 암시하는 글을 올렸다. 블라인드 캡처

블라인드 경찰청 계정으로 강남역에서 흉기난동을 예고한 A씨는 과거 경찰청 계정을 통해 조건만남을 암시하는 글을 올렸다. 블라인드 캡처

취업을 앞두고 회사 내부 정보를 얻거나, 영업에 활용하기 위해 계정을 사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취업에 성공한 박모(29)씨는 “블라인드에 현직자만 알고 있는 정보가 있다는 소문에 블라인드 계정을 구매했다. 자기소개서와 면접 준비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휴대폰 판매업자 강모(43)씨는 “블라인드는 검증된 직장인만 사용한다는 장점이 있어 온라인 판매처로 매력있지만, 직접 블라인드 계정을 만들 수가 없어 구입하게 됐다”고 말했다.

회사 차원에서 블라인드 계정을 거래하는 일도 있다. 익명의 회사 저격 글이 자주 올라오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블라인드 계정을 사들이는 것이다. 한 유통회사 인사팀에 재직하는 최모(26)씨는 “사측에 부정적인 내용이 담긴 글을 삭제하는 것이 인사팀의 역할 중 하나”라며 “거래를 통해 여러 계정을 확보한 뒤, 특정 게시글을 집중적으로 신고해 글을 내리게 하는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개인 판매자’는 주로 이직을 해 더는 해당 계정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삼성 계열사에 재직 중인 김모씨는 “LG 계열사에서 인턴을 할 때 만들었던 블라인드 계정을 판매하고 있다”며 “대기업 계정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판매 글을 올린 지 반나절이 되지 않았음에도 벌써 2명이 문의를 해왔다”고 말했다.

오픈채팅방을 통해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 계정이 거래되고 있다. 판매자는 “다음메일에 저희 사내 메일 덮어씌워드려서 평생 이용가능하세요”고 강조한다. 카카오톡 캡처

오픈채팅방을 통해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 계정이 거래되고 있다. 판매자는 “다음메일에 저희 사내 메일 덮어씌워드려서 평생 이용가능하세요”고 강조한다. 카카오톡 캡처

최근엔 신규 계정을 대량 생성해주는 전문 업자도 등장했다. 계정 구입 수요는 많지만 이직을 통해 계정을 판매하는 공급자는 상대적으로 적어서다. 카카오톡 오픈채팅을 통해 블라인드 계정을 판매하는 업자 B씨는 “개인 메일 주소 아이디(1234@)만 주면 가상의 회사 주소로 이메일 계정을 1234@happycompany.co.kr와 같이 만들어줄 수 있다. 평생 이용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개인 메일을 특정 회사 메일로 연동시키는 방식이라, 판매자들은 이를 ‘덮어씌운다’고 표현했다.

‘경찰 사칭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업자들은 “좀 지나면 문제 없이 계정 판매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B씨와 같이 ‘덮어씌우기’ 방법을 활용하는 C씨는 최근 블라인드 측의 검열 강화로 당분간 계정 판매를 하지 못하게 됐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서비스에 접근한 사실이 의심된다’며 C씨가 만든 회사의 계정 사용을 막은 것이다. 그러나 C씨는 “과거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지만 사업자와 도메인등록증을 다시 제출하면 해결됐다”며 “늦어도 24일 오전에는 계정 판매를 재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재직 여부가 확인된 현직자만 모여있다는 통념이 깨지며 이용자들 사이에 불신이 커지자 블라인드 측은 “사칭 계정으로 의심되는 정황을 정기적으로 조사 중이며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계정에 가입하면 영구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계정 사칭을 통한 불법적인 활동에 대해선 회사가 책임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니지만, 문제가 되기 전 게시글을 숨김 처리하는 데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경찰은 23일 A씨에 대해 협박 혐의를 적용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 관계자는 블라인드 계정 거래나 부정 생성과 관련해 “사칭을 통해 부당한 이익을 얻었다면 사기죄가 성립된다. 또 이득을 본 게 없어도 허위 사실을 유포할 경우 업무방해죄 등을 적용할 수 있고, A씨 경우처럼 협박했다면 협박죄로 처벌도 가능하다”고 주의를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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