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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 '오타'에 2000만원 손해, 그걸 고친 대법원도 '오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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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대법원의 모습. 연합뉴스

서울 서초구 대법원의 모습. 연합뉴스

대구 달서구에 사는 A(65)씨는 지난달 13일 대법원의 결정을 확인하고는 피가 거꾸로 솟았다. 법원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제기한 소송이 결국 심리불속행 기각으로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지난 2021년 12월 A씨는 창원지법 진주지원에 형 B(67)씨가 아버지로부터 상속 명목으로 넘겨받은 부동산(경남 진주시 대곡면 소재 단층 주택)을 분할해달라는 상속재산분할심판을 청구했다. 10개월 만에 나온 진주지원의 결정을 받아보고 A씨는 “명판결”이라고 생각했다. 법원이 스스로 아버지가 남긴 재산을 망라해 해당 주택 뿐만 아니라 대지(631㎡)까지 경매 처분해 받은 금액을 형제 간에 비율에 따라 나눠 가지라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법원이 아버지가 남긴 부동산 목록을 만든 뒤 ‘목록 기재 부동산을 경매해 배분한다’고 결정한 결과였다. 형 B씨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족감은 잠시였다. 결정이 확정되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2022년 10월 A씨가 결정문에 따라 해당 주택과 대지에 대한 경매를 신청하자 재판부가 직권으로 분할대상 재산이 대지를 제외한 단층 주택이라는 경정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각’자를 넣은 게 의도적 명판결이 아니라 법원의 단순 실수라는 얘기였다. 당황한 A씨는 변호사를 다시 선임해 법원의 경정 결정이 위법하다고 이의를 제기(즉시항고)했지만 기각됐고 대법원에 제기한 재항고도 심리불속행으로 끝나면서 소송비용까지 부담하게 됐다.

결국 A씨가 법원을 상대로 경정(更正)을 경정하기 위한 소송을 이어가느라 형제는 2년 8개월째 재산을 나누지도 못하고 있다. 1년 동안 형제가 변호사 선임에 쓴 돈만 2000만원이 넘었다고 한다.

A씨의 재항고를 기각하는 대법원의 결정문을 보고 A씨는 “허탈감마저 들었다”고 한다. 단 2장 짜리 결정문에 오자(誤字)가 2개나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청구인의 등록기준지는 대구 달서구 학산로인데 ‘확산로’라고 쓰여 있었고, 상대방의 등록기준지는 진주시인데 ‘전주시’로 적혀 있었다. 등록기준지는 당사자의 권리행사의 근거가 되는 필수기재사항이다. 대법원 2부(재판장 조재연, 주심 이동원)는 A씨의 변호인이 전화를 걸어 문제 삼은 뒤에야 직권으로 오탈자(誤脫字)를 바로잡았다.

A씨가 친형 B씨를 상대로 낸 상속재산 분할 가사비송합의 사건에 대한 창원지법 진주지원의 직권 경정 결정문이다. 이 사건 재판부는 결정문에 지난해 9월27일 각 부동산을 경매해 그 대금 중 경매비용을 공제한 나머지 금액을 청구인, 상대방이 일정 비율로 배분한다고 썼다가 고쳤다. 독자 제공

A씨가 친형 B씨를 상대로 낸 상속재산 분할 가사비송합의 사건에 대한 창원지법 진주지원의 직권 경정 결정문이다. 이 사건 재판부는 결정문에 지난해 9월27일 각 부동산을 경매해 그 대금 중 경매비용을 공제한 나머지 금액을 청구인, 상대방이 일정 비율로 배분한다고 썼다가 고쳤다. 독자 제공

A씨는 “법원은 틀리면 사과도 없이 슬그머니 고치고, 불복하는 국민은 한 글자 다시 넣자고 수백만원 들여서 또 재판해야 하는 게 대한민국 사법부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A씨를 대리했던 김지혁 변호사는 “법관은 단순 오기라고 하면서 고치고, 양 당사자가 원치 않은 경정 결정이 위법하다고 낸 즉시항고, 재항고를 기각하면서 대법원은 결정문에 등록기준지마저 틀렸다”며 “무용한 다툼이 연장되면서 소송 비용이 늘었고, 당사자 간 갈등 또한 증폭된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라고 꼬집었다.

이 사건 당사자와 소송대리인의 분노는 법조계 내에서 잔잔한 공감대를 얻고 있다. 이호동 변호사는 경기중앙지방변호사회보 8월호에 『법원은 왜 스스로의 실수에는 관대한가-심판 경정의 요건』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2022년도 사법연감에 따르면 판결서에 오탈자를 바로 잡는 결정 등의 경정(민사신청)은 2012~2021년 한해 평균 1만9108건씩 진행됐다. 법원이 귀책을 인정해 스스로 고친 직권 경정은 뺀 숫자다. 대법원 관계자는 “판결서는 법관이 여러 번 확인하고 재판부에서 재차 확인한 뒤 국민에게 도달하게 하는데, 다루는 사건이 워낙 많다 보니 틀리는 경우가 있다”며 “법원이 잘못 쓴 것에 대해 고치는 직권 경정 통계는 작성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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