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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게 칠 수 있는 곡을 고른다" 피아니스트의 선곡 기준

중앙일보

입력

다음 달 27일 독주회를 여는 피아니스트 원재연은 "남들과 다른 아이디어가 있는 곡을 독주회에 우선 선곡한다"고 전했다. 김성룡 기자

다음 달 27일 독주회를 여는 피아니스트 원재연은 "남들과 다른 아이디어가 있는 곡을 독주회에 우선 선곡한다"고 전했다. 김성룡 기자

연주곡목을 모르는 연주회도 있다. 10월 내한하는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와 11월 유자 왕이다. 이들이 연주할 곡은 공연장에 가서야 알게 된다. 쉬프는 지난해 내한 공연에서도 프로그램을 미리 밝히지 않았다. 연주 당일 곡목을 선택해 연주하면서 해설을 붙였다. 쉬프는 “청중에게 더 나은 음악을 들려주는 방식”이라며 요즘 곳곳에서 이렇게 연주한다. 유자 왕 또한 이번 내한 공연의 부제를 ‘Veiling Program: 베일에 싸인 프로그램’이라 붙였다.

피아니스트가 독주회 프로그램을 짜는 방법 #원재연 "나만의 해석 분명한 곡부터" #당일 정하고, 전곡 연주하고, 의미있게 매칭하기도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최근 네덜란드ㆍ덴마크ㆍ미국 등에서 차이콥스키의 ‘사계’ 12곡과 쇼팽의 연습곡 Op.10의 12곡을 매치해 독주회를 열고 있다. 지난해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전에는 콩쿠르 출전 곡인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전곡(12곡)으로 독주회를 했다. 2021년에는 바흐 ‘음악의 헌정’ 중 3성 리체르카레로 시작해 하이든ㆍ멘델스존을 거쳐 베토벤 ‘에로이카’ 변주곡으로 이어지는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피아니스트들은 독주회에서 연주할 곡을 어떻게 결정할까. 쉬프, 유자 왕처럼 끝까지 미뤘다 선택하기도 한다. 임윤찬처럼 같은 제목으로 된 세트 전체를 연주하기도 한다. 또 길고 거대한 작품 하나를 메인으로 정해놓고 나머지 작품을 배치할 때도 있다. 다음 달 27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독주회를 여는 피아니스트 원재연과 함께 ‘프로그래밍 세계’를 들여다봤다. 부조니 국제 콩쿠르 2위 수상 후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피아니스트다.

원재연은 “남들과 다르게 연주할 수 있는 곡, 새로운 해석을 들려줄 확신이 있는 작품을 중심으로 구성한다”고 했다. 다음 달 독주회에도 프로그램의 키를 쥔 작품이 있다. 처음 연주하는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C.P.E) 바흐의 소나타(W.55 No.4)다. 우리가 잘 아는 J.S.바흐의 둘째 아들이다. 힘찬 화음과 스타카토로 시작해 음악적 재료가 계속해서 변화하는데 밝은 빛깔을 잃지 않는다. 원재연은 “꽤 많이 연주되는 곡인데, 다른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들으면서 이렇게 저렇게 연주해보고 싶다는 아이디어가 많이 떠올랐다”고 설명했다. "요소 하나하나가 모두 다르고 독특한 점을 보여주고 싶다"며 이 곡으로 독주회를 시작한다.

11일 서울에서 독주회를 여는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 프로그램은 당일 정해진다. [사진 마스트미디어]

11일 서울에서 독주회를 여는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 프로그램은 당일 정해진다. [사진 마스트미디어]

그는 “평소 다른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많이 듣는다. 그러면서 음악의 방향이 떠오르고, 연주하고 싶은 곡도 늘어난다”고 설명했다. 또 “대가 피아니스트들의 공연을 보면 그 당시 그들이 꽂혀있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작품을 중심으로 선곡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원재연은 2018년 잘츠부르크에서 열렸던 그리고리 소콜로프의 하이든 소나타 (49번)와 슈베르트 즉흥곡(D.935) 조합, 같은 해 쾰른에서 봤던 미하일 플레트네프의 올 라흐마니노프 프로그램을 예로 들었다. “거대한 피아니스트들이 발견한 음악의 매력이 전해졌다. 제일 자신 있고 좋아하는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피아니스트가 발견한 음악의 매력적인 순간을 중심으로 다른 곡을 조합한다. 원재연은 C.P.E.바흐에 하이든ㆍ베토벤을 시대 순서대로 붙였다. “바로크와 초기 고전 시대에 걸쳐있었던 C.P.E.바흐 다음에는 당연히 고전 음악의 기둥인 하이든이 와야 했다.” 하이든이 조용한 서주로 시작한 소나타 C장조(Hob:16/48)다. 그는 “C.P.E.바흐의 밝음과 대조되는 곡으로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려 했다”고 했다.

베토벤의 작품은 또 다른 시대다. 1808년 12월 베토벤이 열었던 대규모 콘서트에서 시작된 작품, 환상곡 g단조(Op.77)다. 베토벤의 아리아, 피아노 협주곡 4번, 교향곡 5ㆍ6번, 합창 환상곡 등이 연주된 길고 긴 공연이었다. 환상곡 g단조는 여기에서 베토벤이 했던 즉흥연주를 기반으로 쓰인 작품. 원재연은 “이 곡 역시 동료 피아니스트의 연주로 듣고 나도 연주하고 싶었다”고 했다. “자주 들을 수 없는 곡인데 내가 연주해서 청중을 설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뜻 질서가 없어 보이지만 듣고 나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뭉쳐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수백 년 된 음악을 반복해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들에게 해석의 신선함은 중요한 선곡 기준이다. 베토벤 이후 연주하는 알렉산드르 스크리아빈의 환상곡(Op.28)에서 원재연은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 천국의 화음을 보여줄 수 있다”고 했다. 2부에서는 많은 피아니스트가 사랑하는 프란츠 리스트의 b단조 소나타를 골라 자신의 해석을 준비했다.

다음 달 서울에서 쇼팽의 작품만 연주하는 독주회를 여는 피아니스트 미하일 플레트네프. [사진 마스트미디어]

다음 달 서울에서 쇼팽의 작품만 연주하는 독주회를 여는 피아니스트 미하일 플레트네프. [사진 마스트미디어]

피아니스트 신수정(서울대 명예교수)은 “성격이 분명한 독주회 프로그램이 많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베토벤ㆍ슈베르트의 전곡을 연주하거나 시대에 따른 소나타 형식의 변화를 살펴보는 식의 학구적 프로그램이 트렌드다.” 또 연주자들의 기량 향상에 따른 변화도 소개했다. “기교적으로 어려운 쇼팽 연습곡 24곡을 예전에는 한두곡씩 프로그램에 넣었다면, 요즘에는 12곡씩 한 세트를 전부 연주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서로 영감을 주고받은 작곡가의 작품을 매치하거나 같은 주제로 쓰인 음악을 연결하는 방법도 있다. 올해 탄생 150주년인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작품만으로 된 공연도 이어지고 있다. 플레트네프는 다음 달 10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폴로네이즈, 환상곡, 뱃노래 등 쇼팽만 연주한다.

원재연은 “피아니스트들은 당장 연주하고 싶은 곡이 100곡씩 있을 것”이라며 “그들이 지금 무대에서 연주하는 곡은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고 자신 있는 작품이니 순간을 함께 즐겨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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