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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레토릭과 국가의 자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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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김정기 한양대 명예교수·커뮤니케이션학

김정기 한양대 명예교수·커뮤니케이션학

북한의 ‘전승절’ 70주년 열병식의 레토릭이 섬뜩하다. 언론과 집회 및 결사를 당 이념과 정책의 선전·선동 수단으로 삼는 전체주의 공산국가임을 고려해도 환멸스럽다. 사실은 왜곡되고, 평화는 없고 폭력의 공포와 개인숭배만 있어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레토릭은 정당하게 사용하면 최대의 선을 행할 수 있고, 부당하게 사용하면 최대의 악을 행할 수 있다”(『수사학』)고 했다.

자칭 전승절은 이성과 상식에서 벗어난 ‘기만 레토릭’의 전형이다. 동족상잔의 범죄를 도발한 6·26 전쟁이 멈춘 것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이다. 휴전을 전쟁에서 이긴 날로 기념하는 건 거짓이다. 1950년 새벽에 38선 전역에서 기습 남침한 침략전쟁을 부인하고 북침을 당했다는 주장 또한 거짓이다. 스탈린과 모택동과 함께 꾸민 전쟁이었음은 구소련이 해체되면서 기밀 해제된 문서도 입증한 사실이다.

북한의 전승절 열병식에 환멸
고가의 무기는 지도자 장식용
피해자·희생자 레토릭 여전해
굶주리는 북한주민 안 보이나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피해자 레토릭’도 적반하장이다. 피해자는 이념과 무력으로 역사의 순리를 바꾸려고 한 공산 권력자들이 아니라 무고한 대한민국 사람과 금수강산 강토였다. 통계청에 따르면 사망자·부상자·포로·실종자를 포함하여 목숨을 잃은 국군과 경찰은 62만 명을 넘는다. 유엔군 인명피해도 15만여 명에 달한다.

무수한 민간인의 생명도 스러졌다. 남한지역 민간인 사망자는 24만4663명에 달하고, 양민학살로 숨진 사람은 12만8936명, 부상자는 22만9625명이다. 북한지역 민간인 사망자와 실종자도 각각 28만2000명, 79만6000명에 이른다. 온 나라가 죽음과 고통의 지옥이었다. 쓰러진 시체 모두는 누군가의 아버지와 엄마이고 아들과 딸이며 형제자매였다. 꿈 많던 생명이었다. 전쟁의 폐허에는 사방이 고아였다. 부모가 죽거나 부모의 손을 놓쳐서 헤매는 불쌍한 어린아이가 10만에 달했다. 분단의 고착화로 단장의 세월을 살다 눈을 감은 이산가족은 또 얼마겠는가.

‘희생양 레토릭’도 구차하고 역겹다. 6·25전쟁 이후 70년이 지난 이 순간까지 특권층을 제외한 주민의 피폐한 생활을 미제와 남조선 괴뢰 집단의 침략 야욕 탓으로 돌리는 것은 거대한 사기이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21년 대한민국 1인당 명목 국민총소득(NGI)은 4048만원, 북한은 142만원으로 약 28.5배 차이가 난다. 자동차는 한국이 2491만1000대, 북한은 25만3000대로 100배쯤의 격차다. 이동통신 가입자 수는 한국 7051만4000명, 북한은 600만 명이다. 무역액은 한국이 1조4149억5000만 달러(약 1815조원), 북한은 15억9000만 달러(2조383억원)로 남한이 북한의 890배이다. 한국의 수출은 6835억8000만 달러로 세계 6위, 북한은 1억6000만 달러이다. 한국의 주요 수출품은 반도체·석유제품·자동차이고 북한은 광물·견직물·가발·조화 등 경공업 제품이다. G7(7개국)의 반열에 올라선 한국에 비해 북한은 전 세계 국가 중에서 하위 10% 수준으로 전락했다. 이쯤이면 어떤 희생양 코스프레로도 이 엄청난 지체와 낙오를 변명할 수 없다.

전승절의 결론은 결국 “만고의 영웅 김정은 동지 만세” “절세의 애국자께 드리는 희대의 축언을 받으시라”다. 열병식에서 과시한 극초음속 병기, 화성포 17형과 18형, 전략무기, 대륙간 탄도, 핵 전투 미사일 등도 지도자를 위한 장신구이다. 인민을 ‘만고의 영웅’에게 절대복종하게 하는 ‘동일시(identification) 레토릭’은 ‘짐이 곧 국가’를 넘어 ‘짐이 곧 진리’에 이르렀다. 인류에게 축복이었던 언어와 비언어를 상징조작의 수단, 감시와 처벌(미셸 푸코)의 도구로 전락시킨 것이다.

국가는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는 인간이 생명 보존 욕구로 형성한 집단(『사피엔스』, 유발 하라리)에서 비롯되었다. 지난 2월 북한 양강도 혜산에서 70대 할머니가 굶주리다 손자와 함께 극단적 선택을 했다. “조선 사람들은 이 땅에 태어난 걸 후회해야 한다”는 유서 내용은 주민의 동요를 우려해 보위부가 입단속을 했다고 한다. 북한의 올해 1~7월 아사자는 240여 명으로 최근 5년 평균 110명의 2배 이상이다.(국회 정보위원회 전체 회의) 북한의 연간 식량 부족분 80만톤 구매에 드는 비용은 약 3647억원, 북한이 지난해 하늘에 쏜 71발의 탄도미사일 발사 비용은 최대 6890억원에 달한다.(국방연구원 추산) 어이없는 세습 공산전체주의 이념을 위해 쏘아 올린 미사일의 그늘에 굶주림과 인권 부재와 수용소가 가려 있다. 거짓 레토릭과 북한 주민의 처참한 고통을 보며 국가라는 집단의 자격을 생각해 본다.

김정기 한양대 명예교수·커뮤니케이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