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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食쌀을 합시다] [기고] ‘쌀의 날’ 맞아 다시 생각해보는 식량주권의 중요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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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원 국립식량과학원장

서효원 국립식량과학원장

요즘 벼 이삭이 패어 여물기 시작하고 있다.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극한의 강우와 폭염 속에서도 때를 맞춰 꽃이 피고 결실을 보고 있는 것이다. 벼가 이삭을 내는 시기인 8월 18일은 농림축산식품부가 제정한 쌀의 날이다. 한자 쌀 미(米) 자를 풀어서 나온 숫자에 맞춰 정한 날로, 벼를 길러 쌀이 되기까지 여든여덟 번 손길을 거친다는 농부의 수고로움을 생각하자는 의미도 담고 있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 통일벼 개발을 통해 주곡인 쌀의 자급을 이루었다. 이전까지 ㏊당 3t을 조금 넘던 쌀 생산량이 통일벼의 보급으로 1977년 약 5t으로 높아져 자급 기준인 4000만석(약 600만t)을 달성한 것이다. 광복 이후 30년간 외국쌀에 의존하던 것에도 자유로워졌다. 이후에도 수량을 높이는 품종을 꾸준히 개발하여 ㏊당 6.3t의 수량을 내는 자포니카형 ‘남찬’, 무려 8.2t의 수량을 낼 수 있는 통일형 ‘금강1호’ 품종 등을 개발하기도 했다.

최근 들어서는 국민 식생활 변화, 기후변화 대응, 지역 맞춤형 등 다양한 수요에 맞춰 새로운 품종을 개발해오고 있다. 최근 농촌진흥청이 개발한 ‘바로미2’는 물에 불리지 않고 쉽게 빻아 밀가루처럼 사용할 수 있는 가루쌀 품종이다. 가루쌀은 밀가루 수입을 대체하고, 식량 생산의 기반인 논을 유지하면서도 쌀 과잉생산과 밀 수급 불안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이앙시기가 6월 말부터 7월 초로 일반벼보다 늦은 가루쌀은 밀, 보리 등 겨울 작물들과 이모작에도 매우 유리하므로 농지이용 효율과 식량자급률을 함께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증가하는 가공용 쌀 수요에 맞도록 ‘미르찰’ ‘미호’ 등 산업체 맞춤형 품종을 개발하고 있고, 메탄가스와 비료 사용을 줄일 수 있는 ‘밀양360호’ 등 저탄소 품종도 한창 개발 중이다. 오랜 기간 일부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일본 품종 ‘고시히카리’와 ‘아키바레’는 최근 농촌진흥청에서 개발한 ‘해들’과 ‘알찬미’ 품종으로 대체되었다. 이 품종들은 밥맛이 뛰어나고 병해충 저항성과 수량성까지 우수해 ‘최고품질쌀’로 인정받았다.

최근 세계 1위의 쌀 수출국 인도가 쌀 수출을 제한한다고 발표한 직후 국제 쌀값과 곡물 가격이 출렁였다. 국제정세의 불안정과 더불어 극한의 폭우, 폭염처럼 요즘 우리가 피부로 느끼고 있는 기후변화는 안정적인 식량 수급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한반도의 기후도 빠르게 열대성으로 바뀌고 있다. 이런 와중에 우리 민족이 오래전부터 주식으로 삼아온 쌀이 열대성 작물로 고온다습한 환경에 적응력이 높다는 점은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식습관이 서구화되면서 쌀 소비량은 줄었지만 쌀은 여전히 우리나라의 주식이다. 그 나라의 생태와 문화에 적합한 고유한 식량과 농업체계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인 식량주권은 국방, 외교에 못지않게 국가의 존립과 경쟁력에 필수요건이다. 농업에 불리한 환경으로 바뀌고 있지만 그동안 쌓아온 품종과 재배기술 개발 역량이 집약된 우리의 쌀은 식량주권의 핵심 품목으로 그 가치가 더욱 커질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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