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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의 작가' 92세 노장 "한 글자도 못 썼나요? 정상입니다"

중앙일보

입력

존 맥피가 프린스턴대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다. 출처: Princeton University 홈페이지

존 맥피가 프린스턴대에서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다. 출처: Princeton University 홈페이지

스포츠 선수 인터뷰 기사부터 미 대륙의 지질학적 특성을 파고든 책까지, 다양한 분야의 논픽션을 써온 대가, 존 맥피. 그가 92세의 나이에 신작을 냈다. 맥피의 이름이 눈에 익다면 당신은 글쓰기에 진심인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그는 "작가들의 작가이자, 기자들의 기자"(이코노미스트 12일자) "살아있는 전설"(미국 GQ, 13일)로 통한다. 뉴요커ㆍ타임지에서 기자ㆍ에디터 생활을 하며 퓰리처상 등 유수의 저널리즘 관련 상을 받았고, 프린스턴대에서 글쓰기 교수로 재직해왔다. '창의적 논픽션(creative non-fiction)'이라는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데, 건조한 사실 나열을 넘어, 쓰는 이의 시각과 맥락을 녹여낸 논픽션이다. 국내에도 글쓰기에 관한 책, 『네 번째 원고』(글항아리)와 에세이가 다수 출간됐다.

뉴욕타임스(NYT) 기자가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그를 인터뷰한 2017년 기사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맥피가 쓴 책들을 조수석에 올려놓았더니 (권수와 분량이 워낙 많아 무게 때문에) 사람인 줄 알고 안전벨트 경고음이 울렸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12일자에서 "의사들이 존경하는 의사가 있듯, 작가들이 존경하는 작가가 있으니, 존 맥피"라고 표현했다. 출판한 책은 32권, 뉴요커에서 기자로 일한 세월은 58년에 달한다.

맥피는 하나의 주제에 천착해 모든 팩트의 조각을 가능한 한 모두 모으고, 팩트 여부를 확인하고, 집을 짓듯 글의 구조를 만든 뒤, 벽돌을 쌓아 올리듯 문장을 다듬으며 써내려간다. 그의 책은 호흡이 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번 신간은 조금 색다르다. 『타불라 라사(Tabula Rasa)』라는 제목으로 펴낸 책은 짧은 에세이 모음집이다. 제목은 라틴어로 '빈 석판'을 의미한다. 철학, 특히 인식론에서 인간이 출생 당시엔 '빈 백지'처럼 태어난 뒤, 외부 세상에서 겪는 감각 및 경험에 의해 마음이 형성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쓰이는 문구다.

존 맥피의 대표 사진. 프린스턴 대학교 자료사진이다. Photo credit: Princeton University

존 맥피의 대표 사진. 프린스턴 대학교 자료사진이다. Photo credit: Princeton University

맥피는 자신의 '타불라 라사'가 어떻게 현재의 자신이 되었는지를 이 책에서 탐구한다. 자신의 성장기와 젊은 시절의 경험들이 어떻게 쌓여 자신을 만들었는지를 써내려간다. 성장의 이야기를 쓰는 데 의외로 자주 등장하는 테마는 '죽음'이다. 소년 시절 친구 줄리안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줄리안과 그는 함께 스케이트를 타러 가기로 약속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맥피의 어머니가 "존, 놀러가지 말고 교회에 가라"고 했고, 줄리안은 다른 친구와 함께 스케이트를 타러 갔다. 그날밤, 줄리안은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호수에 빠져 익사했고, 오른팔을 치켜든 채 꽁꽁 언 시신으로 돌아왔다. 맥피는 "수많은 글을 쓰면서도, 줄리안에 대해선 어떻게 써야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맥피 특유의 솔직함 역시 이번 신간의 미덕이다. 글쓰기로 평생 먹고 살았고, 글쓰기를 가르치는 92세의 글쓰기의 대가는 고백한다. 그에게도 글쓰기란, 아직도 어렵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뉴요커에 글을 쓸 수 있게 될 때까지 맥피는 15번 정도 퇴짜를 맞았다"며 "그래도 그는 계속 썼고, 계속 보냈다"고 했다. 그는 처음엔 타임지에서 연예부 기자로 시작했으나 점차,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는 이들이 아닌, 그 정반대의 대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는 GQ에 "정치와 연예인에 대해선 사실 이미 충분한 기사들이 나와 있다"라면서 "나까지 보탤 필요는 없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글을 잘 쓰는 것은 결국, 못 쓸 것 같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 이게 그의 지론이다. 『네 번째 원고』의 다음 문구가 그의 글쓰기 철학을 대표한다. 제아무리 챗GPT라도흉내 낼 수 없는 고민이 그의 글엔 행간마다 가득하다.
"단어 하나하나가 모조리 자신이 없고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곳에 갇혔다는 느낌이 든다면, 절대로 써내지 못할 것 같고 작가로서 소질이 없다는 확신이 든다면, 실패작이 될 게 빤히 보이고 완전히 자신감을 잃었다면, 당신은 작가임에 틀림없다."

존 맥피가 가족과 함꼐 여가를 즐기고 있다. the Guardian 캡처, 사진 존 맥피

존 맥피가 가족과 함꼐 여가를 즐기고 있다. the Guardian 캡처, 사진 존 맥피

이번 신간뿐 아니라 맥피를 인터뷰한 기사들의 숫자는 그의 명성에 비하면 많은 편이라 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최고의 기자이자 작가를 인터뷰해 글로 쓴다는 것은, 마치 피겨 스케이팅 후배 선수가 금메달리스트 김연아를 만난 뒤, 그 경험을 김연아가 지켜보는 가운데 빙판 위에서 연기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럼에도맥피는 자신을 인터뷰하기로 용기를 낸 기자들에겐 따스하고, 친절하다. 13일 게재된 GQ에서 그는 "마감 루틴이 어떻게 되느냐"는 후배에게 이렇게 답했다.

"아직도 1주일에 6일은 꼭 글을 씁니다. 그런데 말이죠, 대개 하루종일 '대체 이걸 어떻게 쓰지' 패닉하다가 시간을 다 보내고, 그러다 마지막 순간에 뭔가를 겨우 씁니다. 아무리 해도 한 글자도 쓸 수 없을 때가 있나요? 정상입니다. 그렇게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뭔가를 쓰는 데 보내고, 그 365일이 차곡차곡 쌓인다면, 결과가 나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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