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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타락한 지방자치, 최악의 잼버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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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대기자

이하경 대기자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대회가 최악의 평가를 받은 이유 가운데 하나가 부실한 화장실 관리다. 1979년 여름의 논산훈련소 시절이 떠오른다. 부대는 훈련병들의 대변기 사용을 금지했다. 관리하기 귀찮아서였을 것이다. 우리는 변비로 고생했다. 검열을 의식해서 편지에는 “아무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다”고 적었다. 야만의 시대였다.

지방권력 몰염치, 중앙정부 무능
일류국가 코리아 이미지 추락
감사·수사·국정조사 뭐든 다 해야
‘내 탓이오’ 윤리적 결단이 먼저

40여 년이 흘렀다. 한국은 민주화됐고, 선진국 반열에 들어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 세계인의 축제에서 화장실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158개국에서 온 4만3000명이 지내는데 화장실은 354개뿐이었다. 121.5명당 한 개꼴이었다. 변기가 막혀 악취가 코를 찔렀다. 한 사람이 2곳을 관리해야 정상인데 10곳을 담당하다 보니 벌어진 소동이다. 샤워장과 급수장도 턱없이 모자랐다. 한덕수 총리가 솔선해 화장실을 청소하면서 사태는 겨우 진정됐다. 1171억원의 혈세를 도대체 어디에 뿌린 것일까.

잼버리 참가자들은 돈 없고 ‘빽’ 없는 훈련병이 아니다.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청소년들이다. 불결한 화장실과 샤워실, 배수가 안 되고 벌레가 들끓는 진흙탕, 1000명이 넘는 온열환자, 바가지 물가에 분노했다. 그래서 ‘난민 캠프’의 실상을 실시간으로 스마트폰에 담아 전 세계에 알렸다. 반도체와 자동차, 배터리 그리고 한류로 전 세계를 사로잡은 일류국가 코리아의 이미지는 추락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K팝 공연이 위로가 됐을 뿐이다.

이 마당에 전·현 정권이 패를 갈라 남 탓만 할 일이 아니다. 감사든, 수사든, 국정조사든 모조리 해야 한다. 6년의 준비기간 동안 있었던 실체적 진실을 밝히고 성역 없는 징비(懲毖)의 기록을 남겨야 한다. 지방자치단체와 지역 정치인이 잼버리 대회를 유치해 지지부진한 새만금의 인프라 개발 속도를 높이려는 한 것은 탓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행사를 성공시키겠다는 생각도 없이 2조원이 넘는 예산만 노렸다면 토건세력과 결탁한 고의범으로 정죄(定罪)해야 한다.

2015년 일본 잼버리도 간척지에서 열렸다. 하지만 50년 전 간척이 끝난 장소를 선정했다. 새만금의 3분의 1에 불과한 예산으로 대회를 성공시켰다. 반면에 새만금 잼버리는 해수가 유통되는 267만 평의 해창 갯벌을 대회 장소로 정했다. 관광레저사업임에도 농지관리기금 1845억원을 받아내려고 농업용지로 매립했다. 그러니 물이 안 빠지고 염분이 남아 나무가 자랄 수 없었다. 지방정부가 “잼버리 영지에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겠다”고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필요한 면적의 두 배가 넘는 갯벌을 매립하느라 정작 대회 준비에 투입할 시간을 허비했다. 경험 많은 농어촌공사가 아니라 지역 토건업자에게 기반공사를 맡긴 것도 부실한 준비의 원인이 됐다.

지방권력은 “잼버리 행사를 위해 국제공항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비용(8000억원) 대비 예상 편익은 형편없었지만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받았다. 그런데 이 비행장은 아직 착공도 하지 않았다. 개항 목표연도는 6년 뒤인 2029년이다. 애초에 잼버리와는 무관했다는 뜻이다. 수상한 흔적은 끝도 없다.

중앙정부의 책임도 무겁다. 5인 공동조직위원장 중 세 사람이 현직 장관이지만 컨트롤 타워는 없었다. 주무 부처인 여성가족부 김현숙 장관은 지난해 10월 국감에서 “태풍, 폭염에 대한 대책도 다 세워놓았다”고 큰소리쳤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다. 무능하고 무책임했다.

주일 미국대사를 지낸 역사학자 라이샤워 하버드대 교수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직후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만나 “우선이 지자제 실시입니다. 민주화는 지자제에서부터 시작합니다”라고 했다(『김대중 자서전』). 이 나라의 지방자치제는 이승만이 탄생시켰고, 박정희가 살해했다. 김대중은 의정활동을 시작한 1963년부터 지자제 실시를 줄기차게 촉구했다. 1990년에는 13일간 단식 투쟁까지 했다. 그 결과 1991년 부활됐다. 그러나 김대중은 1998년 대통령이 된 뒤에는 타락한 지방자치에 실망했다. 청와대 참모를 통해 “토호와 결탁한 지방자치를 비판해 달라”는 뜻을 필자에게 전달했다. 지금의 지방권력은 그때보다 세고 몰염치하다.

“스핑크스가 묻는다. 아침에는 전(前)근대이고 오후에는 근대이며 저녁에는 탈(脫)근대인 것은 무엇인가? 정답은 한국이다. (중략) 이렇게 세 겹의 시간대가 착종(錯綜)돼 있는 곳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는 괴물이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바로 우리의 실존적 상황이다. 아주 멀리 벗어난 줄 알았는데, 어느새 물샐틈없는 전근대의 구조에 포획된 무력한 존재다. 하나가 해결되면 두 개, 세 개의 문제가 앞을 가로막는다. “장벽이 무너지자 모든 것이 장벽이었다”는 이문재 시인의 은유가 가슴을 친다.

타락한 지방자치에는 수술이 필요하다. 먼저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공동체의 윤리적 결단과 고해성사가 있어야 한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아포리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