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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의사 사형에, 일본 시인이 남긴 “학정의 안개…” 추모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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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박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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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1884~1921·사진) 의사의 사형이 집행됐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여류시인 다카무레 이쓰에(1894~1964)는 추모시 ‘오수시의 제국의 도읍(午睡時の帝都)’을 발표했다. 시에는 항일투사들이 살인·강도·방화 등 엉뚱한 죄명을 뒤집어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데 대한 안타까움, 그리고 일제의 잔혹함이 잘 드러나 있다.

‘(…) 그 밑바닥에는 개미지옥이 우글거리고 있다. 어두운 감옥, 창백한 창. 시모노세키행 3등 열차. 오수시의 바퀴의 굉음. (…) 노조선인. 그의 사랑하는 아들은 박상진, 독립광복단장. 가엽구나! (…) 하늘은 학정의 안개에 덮이고, 피는 하수구 속에 진창이 되어 있다. (…)’

이 시를 포함해 다양한 박 의사 관련 미공개 항일운동 자료가 일본에서 확인됐다. 박상진의사추모사업회를 중심으로 지난 2년간 일본 현지에서 발품을 팔아 발굴한 자료들이며, 분량은 600여 쪽이다. 13일 박 의사의 증손인 박중훈(68)씨 등에 따르면 이번에 일본에서 찾은 자료 중 대표적인 건 크게 네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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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시 ‘오수시의 제국의 도읍’ 원본이다. 이 시는 2011년 이영희 영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원의 논문 ‘일제 강점기 일본 근대시 속의 조선 묘사’를 통해 처음 소개됐다. 추모사업회는 이번에 시의 완전한 원본을 확보했다.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가 순국한 직후 일본 여류시인 다카무레 이쓰에가 쓴 추모시 ‘오수시의 제국의 도읍’의 일부. [사진 박중훈]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가 순국한 직후 일본 여류시인 다카무레 이쓰에가 쓴 추모시 ‘오수시의 제국의 도읍’의 일부. [사진 박중훈]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박 의사의 동생 박하진 선생 재판 판결문도 있다. 박하진 선생은 일본인 간수를 포섭해 옥중의 형에게 필기구를 전달했고, 박 의사는 이 필기구로 함께 수감된 동지들과 연락을 취했다. 필기구 제공 사실이 발각돼 체포된 박하진 선생은 1918년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박 의사의 부친 박시규 선생의 아들 구명운동 자료도 확보했다. 어떻게든 아들을 구하려는 애타는 부정이 고스란히 담긴 구명 청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조사서와 박시규 선생이 일본 사령관에게 보낸 탄원서 등이다. 그 밖에 1920년 재판에 사용된 박 의사 변론서 원본, 국내에선 유실된 것으로 알려진 공주지방법원의 1919년 2월 28일자 광복회 1심 판결문 등도 이번에 확보했다.

박중훈씨는 “1921년 8월 13일자 ‘매일신보’ 기사 속 대구감옥 일본인 소장 인터뷰에 나온 ‘박상진의 사형 집행 때문에 각의가 서너 차례나 열렸다’는 내용을 근거로 추적해 이들 자료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며 “당시 조선 총독부에서 사형 집행을 강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일본 정계에 반대 입장도 있었다는 내용이 보이는 만큼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울산 출신인 박 의사는 1902년 상경해 국내외 정세를 배운 뒤 의병 신돌석, 김좌진 장군과 의형제를 맺었고, 항일 비밀결사인 신민회에서도 활동했다.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해 평양법원에 발령받았지만 “독립운동가를 내 손으로 단죄할 수 없다”며 사퇴했다.

박 의사는 이어 1910년대 전국 규모의 항일 비밀결사인 광복회의 총사령을 지냈다. 광복회는 1915년 8월 대구에서 창설돼 친일부호 처단, 일제 세금 탈취, 조선총독 암살 시도 등 항일활동을 펼쳤다. 1918년 체포된 박 의사는 1921년 38세 나이로 대구감옥에서 순국했다. 1963년 3등급인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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