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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외교·안보 인사 공백 사태…의회 인준 막는 소모적 이념갈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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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형구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형구 워싱턴총국장

김형구 워싱턴총국장

미국 워싱턴 정가를 취재하다 과거 여의도 정치권에서 목도했던 낯익은 풍경을 접하면서 묘한 기시감을 느끼곤 한다. 최근 미국 외교와 안보를 각각 책임지는 국무부와 국방부에서 여야 정쟁으로 인한 고위 인사 인준 지연 사태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이어질 때도 그랬다.

지난달 17일 미 국무부 정례 브리핑에는 이례적으로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등장했다. 그는 야당인 공화당의 제동으로 국무부 후보자 62명의 상원 임명동의안 표결 절차가 미뤄지면서 대사 공백 사태가 장기화하는 현실을 개탄하며 이런 쓴소리를 던졌다. “핵심 보직을 채우는 데 실패하면 이익을 보는 건 적들뿐이다.” 상원 외교위원회에서는 공화당 랜드 폴 의원이 코로나19 기원과 관련된 정부 자료 제출 등을 요구하며 국무부 후보자의 상원 인준을 막아선 상태다.

지난달 17일 미국 국무부 브리핑에 참석한 블링컨 국무장관이 국무부 후보자들에 대한 상원 인준을 촉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달 17일 미국 국무부 브리핑에 참석한 블링컨 국무장관이 국무부 후보자들에 대한 상원 인준을 촉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국방부도 비슷한 일을 겪고 있다. 합동참모본부 총장과 차장, 각 군 참모총장 등 합참 지도부 8명 가운데 육군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이 상원 인준을 받지 못한 채 직무대행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육군과 해병대의 최고 수장이 동시에 공석 상태인 건 미 역사상 처음이라고 한다. 이런 사태는 공화당 보수주의자 토미 튜버빌 상원의원이 낙태 금지 주(州) 군인들이 낙태를 위해 다른 주로 이동하는 여행 경비를 지원하겠다는 국방부 방침의 폐기를 요구하면서 인준을 막아 세우며 생긴 일이다.

최근 미시간주립대 오스트랜더 교수팀이 1987년 이후 미 정부 인사 인준 현황을 분석한 결과, 전체의 약 40%가 지명 후 100일이 지나도록 인준을 못 받았다. 200일이 넘도록 미뤄진 경우는 20%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8일에는 조 바이든 정부에서 첫 아시아계 장관으로 지명된 줄리 수 노동부 장관 후보자 인준이 상원에서 5개월째 표류하자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더는 그를 ‘대행’이라 하지 않겠다. 노동부 장관으로 부르겠다”고 하는 일도 벌어졌다.

한국에서도 이런 광경은 익숙해진 지 오래다. 인사청문회를 거친 장관 후보자의 청문경과보고서가 야당 반대에 가로막혀 정부로 넘어가지 못하면서 대통령이 결국 임명을 재가하는 일 말이다. ‘청문보고서 없는 장관 후보자 ○○번째 임명 강행’ 식의 뉴스를 그간 얼마나 접했던가.

오스트랜더 교수팀에 따르면 특히 정파 간 다툼이 심화하고 이념 갈등이 양극화로 치달으면서 인준 지연 사태가 갈수록 악화하는 흐름이라고 한다. 한국 정치 현실에 비춰봐도 틀림이 없는 얘기인 듯해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