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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아직 답 찾지 못한 ‘거리의 악마’ 충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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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이영희 도쿄 특파원

이영희 도쿄 특파원

얼마 전 도쿄(東京) 신주쿠(新宿)에서 교외 지역으로 향하는 전철인 게이오선을 탔다가 오싹해지는 경험을 했다. 무더운 오후, 사람이 많지 않은 전철에 화려한 색깔의 양복을 입은 남자가 올라타는 순간, ‘아 여기에서 그 사건이 일어났었지’ 떠올리게 된 것이다. 2021년 핼러윈 기간 중 게이오선 내에서 조커 분장을 한 당시 24세의 남성 핫토리 교타(服部恭太)가 승객들에게 칼을 휘두르고 불을 질러 18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사건. 범인 핫토리는 지난달 31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살인 미수와 방화 등 혐의로 징역 23년형을 선고받았다.

2021년 10월 31일 도쿄 게이오선 고쿠료역 칼부림 방화사건 현장에 긴급 출동한 소방관과 경찰들. [AP=연합뉴스]

2021년 10월 31일 도쿄 게이오선 고쿠료역 칼부림 방화사건 현장에 긴급 출동한 소방관과 경찰들. [AP=연합뉴스]

일본에 살며 갑자기 닥쳐올까 무서운 것은 지진뿐이 아니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무차별 살상 사건, 일본명 ‘도리마(通り魔·거리의 악마)’ 사건도 일상의 공포 중 하나다. 일본에서 도리마라는 단어가 나오게 된 2008년의 ‘아키하바라(秋葉原) 사건’은 한국 서현역에서 일어난 칼부림 사건과 놀랍게 겹쳐 보인다. 당시 25세의 범인 가토 도모히로(加藤智大)는 2톤 트럭을 몰고 교차로로 돌진해 5명을 들이받은 후, 차에서 내려 마주치는 행인들을 마구 칼로 찔렀다. 7명이 사망하고 10명이 중경상을 입은,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긴 사건이었다.

사건 후 양상도 비슷하다. ‘아키하바라 사건’ 후 1개월 사이 전국에서 100건 이상의 살인 등 범죄 예고가 이어졌고 33명이 검거됐다. 이 사건에 놀란 일본 정부는 급하게 총도법을 개정해 ‘칼날 5.5㎝ 이상의 양날검’ 소지를 금지했다. 도쿄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됐으며 범죄 수단으로 사용되기 쉬운 렌터카의 대여 요건이 엄격해진 것도 이때부터다.

일본에서 도리마 사건이 가장 많이 일어난 2000년부터 2010년 사이는 버블 경제 붕괴 후 격차 문제가 현실화한 시기였다. 파견노동자 대량해고 사태 등이 일어났고 젊은이들은 노동 시장이 불안정해지면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2013년 일본 법무성이 도리마 사건 재판을 분석해 펴낸 보고서에선 가장 큰 동기가 ‘사회에서의 고립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처지 비관’이었다. 아키하바라 사건의 범인 가토도 범행 전 인터넷에 “패배자는 태어날 때부터 패배자”라고 적었다.

일본은 20년 간 도리마 범죄와 싸워왔지만 여전히 비슷한 사건은 되풀이된다. 젊은이들의 고립과 고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각관방에 고독·고립대책 담당 부서도 만들었으나 뚜렷한 성과는 보이지 않는다. 풀지 못한 일본의 숙제는 이제 한국의 숙제가 됐다. 도리마 공포가 일상화한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치열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