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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잼버리 뒤 여가부 감찰 불가피"…공개당정 안건도 0건 [유명무실 여가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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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가 열리고 있는 7일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이 전북 새만금 잼버리장내 프레스센터에서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3 새만금 세계스카우트 잼버리가 열리고 있는 7일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이 전북 새만금 잼버리장내 프레스센터에서 브리핑하고 있다. 연합뉴스

“태풍과 폭염 대책도 다 세워 놓았다.”(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
“나중에 역사가 장관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이원택 더불어민주당 의원)

지난해 10월 25일 여성가족부 국정감사에서 김현숙 장관과 이원택 의원이 주고받은 대화다. 새만금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 준비가 미흡하다는 야당 의원의 질책에 김 장관이 당당히 답했지만 9개월여가 지난 지금 결과적으로 ‘거짓말’이 됐다.

“생존 게임”이란 세계적 비아냥 거리로 전락한 새만금 잼버리 사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여성가족부 무용론을 다시 끌어올렸다. 애초 여가부에 부정적이던 국민의힘 이준석 전 대표와 허은아 의원 등 여권 비주류는 “압도적 무능”이란 표현을 써가며 공개적으로 “여가부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여권 핵심부에서도 행사 주무부처인 여가부에 대한 마뜩잖은 반응이 표출되고 있다. 여권 고위 관계자는 8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김현숙 장관의 잼버리 대응이 기대 이하”라며 “우선은 잼버리 행사 마무리에 주력하되, 상황이 정리되면 감찰도 불가피하지 않겠느냐”라고 밝혔다. 사실상 문책을 시사한 것이다. 지난 3일 한덕수 국무총리도 잼버리 현장에서 안전 문제가 속출하자 김현숙 장관을 향해 “잼버리가 끝날 때까지 현장을 지키라”며 질타성 지시를 내렸다. 김 장관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강태선 한국스카우트연맹 총재, 김윤덕 의원(더불어민주당, 전북 전주갑)과 함께 공동조직위원장으로 잼버리 행사를 총괄하고 있다.

여권에서는 이미 여가부가 정책적 기능과 부처로서의 지위를 상당수 잃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앙일보가 지난 3월 8일 김기현 대표 취임 이후 열린 국민의힘과 정부의 당정협의회를 전수 조사한 결과, 여가부가 참석한 회의는 4월 6일, 5월 30일, 7월 11일, 7월 13일 등 총 4차례뿐이었다. 이중에서도 4월 6일과 7월 11일 회의는 특정 안건 없이 간담회 형식으로 비공개 진행됐다. ‘묻지마 칼부림’ 사건, LH 부실 아파트, 교권 침해 등 현안이 터질 때마다 국회로 달려오는 다른 부처와 확연히 대비된다.

국민의힘 강기윤 제5정책조정위원장이 5월 3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5정책조정위원회 실무당정협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경희 여성가족위원회 간사, 임이자 환경노동위원회 간사, 강기윤 제5정책조정위원장 및 보건복지위원회 간사, 이기일 보건복지부 제1차관, 권기섭 고용노동부 차관, 유제철 환경부 차관, 황윤정 여성가족부 기획조정실장. 연합뉴스

국민의힘 강기윤 제5정책조정위원장이 5월 3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5정책조정위원회 실무당정협의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경희 여성가족위원회 간사, 임이자 환경노동위원회 간사, 강기윤 제5정책조정위원장 및 보건복지위원회 간사, 이기일 보건복지부 제1차관, 권기섭 고용노동부 차관, 유제철 환경부 차관, 황윤정 여성가족부 기획조정실장. 연합뉴스

공개로 진행된 지난 5월 30일 회의도 윤재옥 원내대표나 박대출 정책위의장이 아닌 강기윤 제5정책조정위원장이 보건복지부·환경부·고용노동부·여가부를 대상으로 개최한 실무 당정협의회였다. 그때도 다른 부처는 차관급 인사가 참석했지만, 여가부는 기획조정실장이 참석했다. 7월 13일 여가부가 참여한 ‘난임·다둥이 맞춤형 지원 대책’ 당정협의회도 복지부와 고용부가 현안을 주도했고, 여가부는 보조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여가부가 주관하는 정책을 단독 안건으로 상정한 공개 당정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국민의힘 지도부 인사는 “김기현 대표 체제가 들어선 뒤 여당이 정책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해 하루에 두 번씩 당정이 모인 경우가 허다했다”며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부처라면 중요 정책이나 긴박한 현안이 한 건도 없었겠느냐”고 지적했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의 의안 처리 실적도 현저히 떨어지고 있다. 21대 국회 전반기 여가위 의안 처리 건수는 58건(원안·수정안 가결 및 대안 반영 포함)으로 같은 기간 20대 국회(111건)와 19대 국회(121건) 절반 수준에 그쳤다. 국회 관계자는 “여가위에 접수되는 의안 건수 자체가 줄어든 건 아니다”며 “정책이 제대로 추진된다는 보장이 없으니 법안 논의도 쉽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국회 여가위가 주최한 법안 공청회도 21대 때는 세 차례만 열렸다. 20대 때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 성차별 등 6개 법안에 대해 4차례, 19대 때 7차례 개최된 걸 고려하면 “여가위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라는 말이 나온다.

원희룡 국토교통부장관이 지난달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서울~양평 고속도로 사업 관련 실무 당정협의회에서 주도적으로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원희룡 국토교통부장관이 지난달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서울~양평 고속도로 사업 관련 실무 당정협의회에서 주도적으로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여권 고위 관계자는 “현재의 여가부를 다른 부처와 동일선상에 있는 부처로 보긴 어려운 상황”이라며 “여가부 폐지냐, 존치냐를 떠나 여가부가 하지 못하고 있는 역할에 대해선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홍성걸 국민대 행정학과 교수는 “성평등 문제는 여가부의 전유물이 아닌 범부처 문제”라며 “이를 해결하려면 강력한 힘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처럼 힘 없는 여가부로는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폐지한다던 여가부,예산은 늘었다…유엔엔 “폐지 아냐” 혼선도 [유명무실 여가부]

여성가족부가 처해있는 어정쩡한 현실은 수치로도 드러난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의 반대로 부처 폐지 논의가 중단된 사이 예산은 오히려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2022년 10월 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여성가족부 폐지 등을 담은 윤석열 정부의 정부조직 개편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2022년 10월 6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여성가족부 폐지 등을 담은 윤석열 정부의 정부조직 개편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올해 여가부 예산은 1조5678억원으로 전년 대비 약 7.0%(1027억원) 증가했다. 국회 논의 과정에서 약 173억원 증액되기도 했지만 애초 정부가 국회에 제출할 때 지난해 확정 예산(1조4650억원)보다 855억원 더 늘린 1조5505억원의 예산안을 짜왔다. ▶맞춤형 가족 서비스 확대 ▶폭력 피해자 지원 강화 ▶사회적 약자 지원 강화 등에 중점을 두겠다는 목표와 함께였다.

물론 부처가 존속하는 한 소관 업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예산을 쓰는 건 당연하지만 국민의힘 내에서도 “의아하다”는 반응이 나왔었다. 문재인 정부 때 여가부 예산은 7000억원 대에서 1조4000억원 대로 두 배 가까이로 뛰었는데, 전 정부의 이런 기조가 유지됐기 때문이다. 대선 공약으로 여가부 폐지를 약속한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에도 여가부 예산이 증가하자 2030 남성이 주로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뒤통수를 맞았다”는 반응까지 나왔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물론 윤석열 정부가 여가부 폐지 공약을 어기려고 했던 건 아니다. 지난해 10월 6일 행정안전부는 ▶여가부 폐지 뒤 보건복지부와 고용노동부로 기능 이관 ▶국가보훈처 승격 ▶재외동포청 신설을 담은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여가부 내 청소년·가족, 양성평등, 권익증진 기능은 복지부로 이관하고 복지부 산하에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를 신설해 해당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또 여성고용 기능은 고용노동부로 넘기도록 했다. 이상민 행안부 장관은 당시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장을 장관과 차관 사이로 대우해 정책 추진과 대외교섭력에 지장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여가부 폐지가 관련 업무의 축소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그래서 당시 정치권에선 “2030 여성층과 야권 반발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그러나 정부조직법 개정안 논의 과정에서 여가부 폐지안은 빠졌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여가부 존치를 주장하는 민주당의 반대를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여가부 폐지는 대국민 약속이고 공약이기 때문에 폐지 방침에 변함이 없지만, 민주당이 동의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결국 국가보훈처를 국가보훈부로 격상시키고, 외교부 산하에 재외동포청을 신설하는 내용만 담긴 개정안이 올해 2월 27일 본회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그 이후 정치권에서 여가부 폐지를 위한 논의는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그러는 사이 여가부의 어정쩡한 처지가 이어졌다. 당초 ‘부처 폐지’라는 특명을 받아 야당으로부터 “여가부 폐지에 동의하면서 그 자리에 왜 있냐”는 비판을 받았던 김현숙 여가부 장관도 최근 들어 폐지설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지난 5월 17일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김 장관은 “사실상 여가부 폐지 이슈는 수면 밑으로 내려갔다”고 인정했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이 지난 5월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취임 1주년을 맞아 출입기자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여성가족부 제공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이 지난 5월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취임 1주년을 맞아 출입기자들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여성가족부 제공

여가부 폐지와 관련해 정부가 유엔(UN)에 보낸 답변서 내용도 혼선을 가중시켰다. 여가부 폐지가 담긴 정부조직 개편안에 대해 림 알살렘 유엔 여성폭력특별보고관과 여성차별실무그룹은 지난 5월 22일 정부에 공개 서한을 보내 우려를 표했다. 이에 정부는 “정부의 조직개편안은 여가부 폐지를 의도로 한 것이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답했다는 게 지난달 21일 유엔 홈페이지를 통해 드러났다. 폐지 방침을 고수하던 정부가 “여가부 폐지는 오해”라는 취지의 답변을 하자 2030 남성을 중심으로 “정부가 2030 남성을 무시하는 증거”라거나 “공약 파기”라는 등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나왔다.

결과적으로 공약을 어기고 있는 셈이지만 국민의힘은 지금 당장은 여가부 폐지를 추진할 동력이 없다는 입장이다. 국민의힘 원내 핵심 관계자는 “여야 간 여가부 폐지 논의는 현재 없다”며 “여소야대 구도에서는 추진해봐야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의원도 “여가부 폐지 문제는 사회 내 의견이 극심하게 갈리는 사안”이라며 “총선을 앞두고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신세”라고 말했다.

전민구 기자 jeon.ming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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