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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폭염에 수레 끈 할아버지…폐지·고물 265㎏ 팔고, 만원 받았다

중앙일보

입력

지난 3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서 곽모(74)씨가 수레에 폐지를 수거해 담고 있다. 당시 체감 온도는 35도에 육박했다. 이영근 기자

지난 3일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서 곽모(74)씨가 수레에 폐지를 수거해 담고 있다. 당시 체감 온도는 35도에 육박했다. 이영근 기자

 체감 온도가 35도까지 치솟은 지난 3일 오전 11시. 서울 용산구 효창동의 한 고물상에서 폐지 수거 노인 곽모(74)씨가 빈 수레를 끌고 거리로 나섰다. 오전 6시에 나온 그는 벌써 네 번째 고물상을 오간 참이었다. 곽씨가 목에 두른 빨간색 수건은 땀에 절어 시큼한 냄새가 났다. 하의 곳곳엔 동전 구멍만 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곽씨는 “통풍 잘되라고 일부러 낸 구멍”이라며 “폐지가 날카로워 반바지는 못 입기 때문에 만든 나만의 패션복”이라고 말했다.

달궈진 아스팔트 도로에서 수레를 끌던 곽씨는 5분 간격으로 휴식을 취했다. 숨을 한참 고르던 곽씨에게 자영업자 장주영(39)씨가 다가와 생수 2병을 건넸다. 장씨는 “가게에 오는 폐지 수거 노인들이 쓰러질까 봐 걱정돼 생수, 빵, 박카스 등을 항상 구비해놓고 있다”고 말했다.

1시간 반 뒤 다시 고물상에 도착한 곽씨의 수레에 쌓인 폐지와 고철은 그의 키보다 높았다. 걸음 수는 7532보였다. 265㎏ 어치를 고물상에 팔고 현금 1만원을 손에 쥔 곽씨는 “누가 월세, 생활비 대신 내주는 것도 아니니 먹고 살려면 나와야 한다”면서 “더워서 죽으면 죽는 것이고 다 하느님 뜻에 달렸다”고 말했다.

지난 3일 서울 용산구에서 자영업자 장주영(39·왼쪽)씨가 폐지 수거 노인 곽모(74)씨에게 생수 2병을 건네고 있다. 이영근 기자

지난 3일 서울 용산구에서 자영업자 장주영(39·왼쪽)씨가 폐지 수거 노인 곽모(74)씨에게 생수 2병을 건네고 있다. 이영근 기자

 기록적인 폭염 속에 야외에서 일하는 노인들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 만성질환자가 많아 면역력이 낮고 땀 배출 기능이 떨어지는 노인은 더위에 특히 취약하다. 3일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지난 5월 20일 이후 온열질환자는 누적 1385명이며 추정 사망자는 18명으로 집계됐다. 사망자 중 65세 이상 노인이 13명이다. 발생 장소는 실외 작업장(31.9%)이 1위였다. 2일 광주에서 폐지를 줍다 쓰러진 A(67·여)씨의 사망 당시 체온은 41.5도였다.

일부 노인들은 지자체가 지원하는 무더위쉼터에서 더위를 견디기도 한다. 이날 오후 2시쯤 찾은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화촌경로당에선 70~90대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차를 마시고 TV를 보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에어컨을 튼 내부 온도는 26도로 쾌적했다. 정태순(94)씨는 “집에서 할 것도 없고 여기서 시원하게 보내는 게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는 노인들은 “먹고 살아야 하는데 덥다고 쉴 순 없다”고 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5월 기준 65~79세 고령층의 고용률은 45.2%로 노인 절반 가까이가 계속 일하고 있다. 통계청이 26일 발간한 ‘통계플러스 여름호’에 따르면 2019년 66세 이상 고령층의 상대적 빈곤율(중위소득의 50% 이하)은 43.2%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가장 높은 수치다.

70~90대 노인 11명이 지난 3일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화촌경로당에서 TV를 보며 휴식을 취하거나 고스톱을 치며 시간을 보냈다. 에어컨과 선풍기를 튼 내부 온도는 26도로 쾌적했다. 이찬규 기자

70~90대 노인 11명이 지난 3일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화촌경로당에서 TV를 보며 휴식을 취하거나 고스톱을 치며 시간을 보냈다. 에어컨과 선풍기를 튼 내부 온도는 26도로 쾌적했다. 이찬규 기자

 이날 오전 10시쯤 용산구 삼각지역 인근에선 60대 중반 미화원 김모씨가 도로와 인도를 오가며 쓰레기를 치우느라 분주했다. 오전 6시부터 근무를 시작했다는 김씨는 “폭염 때문에 근무 시간이 단축됐는데 정해진 구역은 같아서 마음이 급하다”고 했다. 김씨는 “동료들 대부분 다른 직장에서 은퇴한 60~70대 노인들이다. 경비원으로 일한 적도 있는데, 미화원이 벌이가 더 좋아 2년 전부터 근무 중”이라고 말했다.

강서구 화곡동 까치산역 앞에서 이동식 좌판을 펴고 바퀴벌레 퇴치제 등을 판매하는 송모(75)씨도 “폭염 탓에 어지럼증을 느끼지만 기초연금만으로 생계를 꾸리긴 어렵다”며 “집에 에어컨이 있긴 한데 요금이 부담돼 켜질 않는다”고 말했다. 까치산시장의 한 야채 가게에서 배달 일을 하는 박상재(67)씨도 “과거 화물차 운전 일을 하다 은퇴했는데 모아둔 돈도 별로 없고 병원비가 부담돼 다시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날씨가 더워 피부가 새빨갛게 익었다”는 박씨는 배달 늦겠다며 서둘러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까치산시장의 한 야채 가게에서 배달 일을 하는 박상재(67)씨는 “날씨가 더워 피부가 새빨갛게 익었다. 생계 유지를 위해서는 일할 수밖에 없다”며 서둘러 오토바이 운전에 나섰다. 이찬규 기자

까치산시장의 한 야채 가게에서 배달 일을 하는 박상재(67)씨는 “날씨가 더워 피부가 새빨갛게 익었다. 생계 유지를 위해서는 일할 수밖에 없다”며 서둘러 오토바이 운전에 나섰다. 이찬규 기자

 지방자치단체에서 제공하는 ‘노인 일자리’의 혹서기 야외 작업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대다수 지자체가 폭염 대책 일환으로 근무 시간대를 오후에서 오전으로 변경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17일부터 서울시 공공일자리 사업에 참여해 자전거·개인형 이동장치(PM) 주차 관리 업무를 맡은 최흥수(72)씨는 “자녀들의 용돈 부담을 줄이려고 일을 시작했다”며 “한창 더울 때는 구청에서 그늘에서 쉬라고 해서 고맙다”고 말했다. 다만 “공공일자리 조끼가 꽤 더워서 명찰 등 다른 표식으로 대체하면 좋겠다”고 했다. 기상청은 13일까지 대부분 지역에서 최고 체감온도가 33~35도에 달하는 무더위가 이어진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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