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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는 80장 걸고 누구는 0장…현수막도 특권, 희한한 법 [도 넘은 현수막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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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국회의 입법 미비로 오늘(1일)부터 누구나 언제든지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현수막이나 유인물을 배포할 수 있게 돼 정치 현수막 공해가 우려되고 있다. 이날 오전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 횡단보도에 정치 현수막이 게시돼 있다. 뉴시스

국회의 입법 미비로 오늘(1일)부터 누구나 언제든지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현수막이나 유인물을 배포할 수 있게 돼 정치 현수막 공해가 우려되고 있다. 이날 오전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 횡단보도에 정치 현수막이 게시돼 있다. 뉴시스

김경진 국민의힘 동대문을 당협위원장은 자신의 얼굴을 넣은 현수막을 한 달에 80장 내건다. 옥외광고물법이 정한 게시 제한기한 15일을 주기로 40장을 한 달에 한 차례 교체하는 식이다. 김 위원장은 “개수 제한이 없다 보니 지역민에게 얼굴을 알리기 위해 현수막을 최대한 많이 뿌린다”고 했다.

반면에 내년 총선을 앞두고 충북 지역에 출사표를 던진 A씨는 지난 6월 출마선언 뒤 단 한장의 현수막도 붙이지 못했다. 옥외광고물법상 정당 현수막은 당협·지역위원장만 붙일 수 있어서다. A씨는 “신인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환경”이라고 했다.

내년 4·10 총선을 8개월여 앞두고 현수막 전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기득권 공고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기성 정치인은 아무런 제한 없이 현수막 게시가 가능하지만, 정치 신인은 단 한장의 현수막도 붙일 수 없어서다.

①빈익빈 부익부

옥외광고물법상의 정당 현수막은 정당의 활동을 홍보하거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하는 내용을 담게 돼 있다. “민생정치합시다”(국민의힘), “국익을 지켜달라”(더불어민주당) 등의 내용이지만 옆에는 당협·지역위원장의 얼굴 사진과 이름이 붙는다. “굳이 자신을 알리는 문구를 쓰지 않아도 홍보효과가 상당하다”는 평가다.

서울 동대문구 장한평역 인근에 있는 김경진 국민의힘 동대문을 당협위원장이 붙인 현수막. 김효성 기자

서울 동대문구 장한평역 인근에 있는 김경진 국민의힘 동대문을 당협위원장이 붙인 현수막. 김효성 기자

통상 1개 지역구에 평균적으로 한 달에 10~30장의 현수막이 걸린다. 현수막 한장 비용은 10만원 정도다. 전체 비용 300만원의 절반 가량은 당협·지역위원장이 시·도당에 낸 특별당비로 충당한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자신의 얼굴을 알릴 수 있기 때문에 큰돈을 들여서라도 홍보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당협·지역위원장이 현역 의원인 경우에는 자신의 정치후원금을 활용할 수 있어 더 많은 현수막을 달 수 있다.

나머지 비용은 책임당원이 낸 당비(약 80만원)와 중앙당 및 시·도당이 비정기적으로 지급하는 홍보지원비(약 80만원)로 충당된다. 중앙당 지원금에는 국고보조금도 포함된다. 결과적으로 국민 세금이 기성 정치인 현수막 제작에 쓰여지는 것이다.

반면에 당협·지역위원장이 아닌 경우엔 아예 정당 현수막을 붙일 수 없다. 만약 정치 신인이 자신을 홍보하는 현수막을 붙이려면 올해 12월 12일(선거 120일전)이 돼서야 선거관리위원회에 총선 예비후보 등록을 하고, 선거홍보용 현수막 부착 권한을 얻을 수 있다. 그 이전에 비정치적인 사안 관련 현수막을 달려고 해도 옥외광고물법상 지자체 허가가 필요하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국민의힘 원외 인사는 “옥외광고물법에는 정당 현수막이 아닌 일반 현수막은 게시장소가 정해져 있고, 그 자리는 경쟁이 치열해 따기 쉽지 않다. 또한 다른 장소에 붙이면 곧장 떼인다”며 “목 좋은 곳에 붙일 수 있는 정당 현수막과는 차별이 크다”고 토로했다.

②경쟁자보다 선점하기

경쟁이 치열한 지역구의 현수막 전략은 다양하다.

고민정 민주당 의원은 내년 총선에서 자신의 지역구(서울 광진을)의 현수막 게시 전략을 바꿨다. 고 의원은 최근 민주당 중앙당에서 보낸 ‘윤석열 대통령 비판’ 현수막을 일부러 달지 않았다. 민주당 관계자는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출마설이 도는 데다 오신환 전 의원이 국민의힘 소속으로 이 지역에 출사표를 던져 총선 당선을 위해 필수적인 중도층에 손을 내민 것”으로 해석했다. 대신 "XX초등학교 부지 개발 환영"과 같은 지역형 현수막을 걸었다.

김웅 국민의힘 의원 지역구(송파갑)인 서울 송파구 방이동 인근에 부착된 김 의원의 현수막. 김효성 기자

김웅 국민의힘 의원 지역구(송파갑)인 서울 송파구 방이동 인근에 부착된 김 의원의 현수막. 김효성 기자

서울 송파갑이 지역구인 김웅 국민의힘 의원도 최근 현수막 사진을 국회에서 질의하는 모습으로 바꿨다. 문구도 “○○고등학교 엘리베이터 재설치” 등 비정치적 내용이 많았다.

서울 종로구가 지역구인 최재형 국민의힘 의원은 외국인 관광객이 많은 경복궁 인근에는 현수막을 아예 달지 않는다. 관광지에 정치 현수막이 있으면 일반 유권자의 거부감이 커지는 것을 우려해서다.

③도전자의 설움

당협·지역지원장이 아닌 인사는 고초가 크다. 지난달 초 허은아(비례) 국민의힘 의원은 서울 동대문을 지역구에 “동대문댁 허은아”라는 문구의 현수막을 구청이 허가하지 않은 현수막 게시 장소에 내걸었다가 구청에 철거당했다. 허 의원은 지난해 12월 국민의힘 동대문을 조직위원장 공모에서 탈락해 정당현수막 게시 권한이 없다. 대신 허 의원은 지역 봉사활동을 하면서 내년 총선을 대비하고 있다.

허은아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달 21일 동대문구 전농초등학교 앞에서 교통안전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블로그 캡처

허은아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달 21일 동대문구 전농초등학교 앞에서 교통안전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블로그 캡처

수도권 한 지역구에 출마를 타진하는 국민의힘 전직 의원은 지난달 해당 지역에 ‘○○지역 개발 환영’이란 문구의 현수막을 달았다. 이 인사는 “○○지역 개발은 국민의힘 소속 구청장의 성과인데, 민주당 소속 현역 의원이 자신의 성과로 홍보했다”며 “실상을 알리기 위해 구청이 제 현수막을 철거할 것을 각오하고 달았다”고 했다.

서울 광진갑 출마를 원하는 민주당 소속 일부 인사들은 금요일인 지난달 28일 일제히 정당 현수막을 달았다. 지역위원장이 아니어서 현수막을 게시할 수 없지만, 주말에는 구청이 현수막을 떼지 않는 '틈새시간'을 노렸다. 해당 현수막은 월요일인 지난달 31일 곧바로 철거됐다.

양승함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는 “당협·지역위원장에게만 현수막 게시 권한을 주는 것은 형평성에 위배되는 일이어서 유권자의 선택지를 오히려 좁게 만들 것”이라며 “단순히 형평성 문제뿐만 아니라 당락 자체에 영향을 주는 일로 번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현수막 총량 규제를 통해 ‘현수막 공해’ 문제도 막으면서 형평성까지 고려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현수막에 얼마 썼는지도 파악안돼…특별당비 꼼수도 동원

국회 입법 미비로 인해 누구나 선거운동을 위한 현수막 설치가 가능해진 1일 오전 서울 양천구 길거리에 걸린 정당 관련 현수막의 모습. 연합뉴스

국회 입법 미비로 인해 누구나 선거운동을 위한 현수막 설치가 가능해진 1일 오전 서울 양천구 길거리에 걸린 정당 관련 현수막의 모습.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현행 옥외광고물법이 시행되면서 여야의 현수막 출혈 경쟁은 극심해졌다. ‘정당이 정책이나 정치적 현안에 대하여 표시·설치하는 경우’ 사전 신고나 허가 없이, 수량과 규격의 제한도 없이 현수막을 어디든 걸 수 있게 되면서다.

중앙당이 시·도당에 하달하는 현수막 시안 개수부터가 크게 늘었다. 옥외광고물법 통과 시점인 지난해 12월 11일 전후를 비교하면 약 1.5배 안팎으로 늘었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국민의힘은 법 통과 이전 6개월(2022년 6월 10일~2022년 12월 10일)간 16번, 법 통과 이후 6개월(2022년 12월 11일~2023년 6월 11일)간 27번의 시안을 배포했다. 같은 기간 더불어민주당도 18번의 시안 배포가 25번으로 늘었다. 해당 내용을 잘 아는 한 국민의힘 당직자는 “옥외광고물법 통과로 고삐가 풀리면서 양당이 경쟁적으로 ‘양치기’(양으로 밀어붙이기)에 나섰다”고 말했다.

현수막의 숫자가 늘면 관련 비용도 자연히 증가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관련 비용이 얼마나 지출되고 있는지는 파악이 쉽지 않다. 각 정당이 작성해 매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하는 회계보고서엔 ‘현수막’이란 별도 항목이 없고, 각 정당에 따라 ‘홍보비’나 ‘선전비’ 명목으로 뭉뚱그려 기재하기 때문이다. 또 같은 당 내에서도 중앙당 및 각 시·도당 별로 현수막 비용 처리 방법이 제각각이다.

국민의힘 중앙당이 전국 시ㆍ도당위원회에 하달한 현수막 시안 예시. 사진 국민의힘 홈페이지 캡처

국민의힘 중앙당이 전국 시ㆍ도당위원회에 하달한 현수막 시안 예시. 사진 국민의힘 홈페이지 캡처

행정안전부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정당 현수막은 기본적으로 정당 경비로 설치해야 한다. 정당 경비는 국민 세금을 기반으로 국가가 정당에 주는 보조금, 당원이 정기적으로 납부하는 당비·후원금으로 충당된다. 현수막 개수가 늘어나면 국민 세금 투입도 늘어나는 구조다.

하지만 홍보를 위해 더 많은 현수막을 걸려는 이들은 정당이 나눠주는 경비만으론 돈이 부족하다. 그래서 일부 원외 당협(지역)위원장들의 경우 ‘특별 당비’를 당에 납부하고 이를 정당에서 되돌려 받는 편법으로 현수막을 추가적으로 게시한다. 외관상 정당 경비지만 실제로는 개인 자금을 쓰는 것이다. 내년 4월 총선 출마를 준비 중인 한 정치 신인은 “돈이 있는 자와 없는 자가 확연히 드러나는 게 바로 현수막”이라며 “여유 자금이 없는 입장에선 국민에 이름을 알리는 현수막 홍보에서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 있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이 전국 시ㆍ도당위원회에 하달한 현수막 시안 예시. 사진 더불어민주당 홈페이지 캡처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이 전국 시ㆍ도당위원회에 하달한 현수막 시안 예시. 사진 더불어민주당 홈페이지 캡처

용도 폐기된 현수막 처리 비용도 문제다. 여기에도 국민 세금이 투입된다는 문제도 있고, 또 환경 문제를 유발한다는 점에서도 골칫거리다. 폐 현수막은 플라스틱 재질이어서 대부분 소각 또는 매립되는데, 환경부에 따르면 올 1~3월 정당 현수막을 포함해 전국 지자체에서 수거된 현수막이 1300t에 달한다.  환경운동연합에 따르면 현수막 1장을 소각하면 4㎏의 온실가스가 배출된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허가·신고제를 다시 도입하는 방식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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