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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화사족’ 새 정치 바람 반영, 조선 왕정 혁신을 꾀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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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0호 26면

[근현대사 특강] 고종의 즉위와 정계 변화 〈상〉

조선 후기 국왕의 즉위식이 거행된 곳은 창덕궁 인정문이다. 인정문 너머로 인정전이 보인다. 새 왕은 인정전이 아닌 인정문 가운데 놓인 어좌에 앉아 좌우 전면에 줄지어선 신하들을 만났다. 최영재 기자

조선 후기 국왕의 즉위식이 거행된 곳은 창덕궁 인정문이다. 인정문 너머로 인정전이 보인다. 새 왕은 인정전이 아닌 인정문 가운데 놓인 어좌에 앉아 좌우 전면에 줄지어선 신하들을 만났다. 최영재 기자

1863년 12월 8일(음력) 철종이 승하하자 익종의 비 조씨(신정왕후·1808~1890)가 대왕대비 자격으로 흥선군의 둘째 아들 이재황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하였다. 13세 소년 이재황. 대왕대비는 그를 자신의 부군이던 효명세자, 즉 익종의 아들로 삼아 익성군(翼成君)에 봉하여 입궐시켰다. 익성군은 미성년으로 나흘 뒤 12일에 성년식을 올리고 13일 하루에 성복(成服)과 등극의 예를 가졌다. 드라마 속의 즉위식은 거창하다. 창덕궁 인정전 높은 건물 가운데 보좌에 앉아 저 아래 품계석에 줄지어 선 신하들의 축하를 받는다. 상중에 과연 이런 행사를 했을까. 고종의 즉위에서 실제를 보자. 익성군은 시신이 안치된 혼전(선정전)에서 성복하고 빈전으로 가서 대보(大寶)를 내려받은 다음 면복(冕服)으로 갈아입고 혼전으로 나와 인정전으로 향했다. 그러나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인정문(仁政門) 입구에서 멈춰 섰다. 문 가운데 직선상에 놓인 보좌에 앉아 좌, 우와 앞쪽에 도열한 백관들을 만난다. 짧은 상견례 후 왕은 되돌아 선정전으로 가서 상주 노릇으로 국사를 시작한다. 상중에 이루어지는 즉위식은 이렇게 숙연했다.

흥선군 아버지, 박제가 문하서 공부

대왕대비 조 씨는 왜 흥선군의 아들을 택했던가. 첫째, 흥선군은 대비 자신의 부군인 익종과 가장 가까운 왕손이었다. 익종은 정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증손이고, 흥선군은 사도세자의 넷째 서자인 은신군(恩信君)의 손자로서 익종과 6촌 형제간이다. 왕실 안에서 익종과 제일 가까운 사이였다. 둘째, 흥선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위상이다. 은신군의 양자 남연군은 순조와 4촌 사이로 순조 재위 중 화성의 현륭원(사도세자 묘원)과 건릉(정조 능) 관리 총책을 맡았다. 남연군은 북학파 박제가의 문하에서 추사 김정희와 같이 공부한 인연으로 아들 흥선군을 추사에게 보내 서예를 배우게 하였다. 조대비는 부군 익종이 대리청정 중에 추사 김정희를 가까이 한 사실을 잊지 않았다.

조대비의 풍양조씨 가문은 어떤 집안이었나. 풍양조씨는 안동김씨와 함께 19세기 ‘세도정치’의 주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증조부 이래의 가문의 명성과 이미지는 권력을 휘두르는 세도 외척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대비의 아버지 조만영(1776~1846)은 1816년 전라도 암행어사로 활약하면서 이름을 날렸다. 암행하는 고을에서 조세 담당 아전부터 족쳐 주민들이 “악질을 귀신같이 잡아낸다”라는 경탄을 자아내 다산 정약용의 『경세유표』에 모범 사례로 올랐다. 할아버지 조진관(1739~1808) 또한 순조 재위 중 호조판서로 가뭄의 타격을 입은 고을에 조세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납부 연기 또는 대납 분납의 제도를 도입해 찬사를 받았다. 증조부 조엄(1710~1777)은 영조 때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오면서 쓰시마에서 고구마 종자를 가져와 민생에 도움을 준 바로 그 사람이다. 동생 조인영은 금석학에 조예가 깊어 김정희와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조사에 나섰다. 권력을 휘두른 세도 외척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너무나 모범적인 가풍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그래픽=남미가 기자 nam.miga@joongang.co.kr

일본은 청일전쟁을 ‘문명국’ 일본이 청의 ‘야만’을 격퇴하는 전쟁이라고 선전하였다. 조선과 청의 유교 문화를 야만으로 몰아 청의 그늘에 있는 조선을 구하는 전쟁이라고 했다. 이후 일본은 조선 역사에 ‘유교 망국론’을 적용하여 당쟁의 폐단을 강조했다. 최초의 한국사 개설서로 알려지는 일본인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1854~1922)의 『조선통사(朝鮮通史)』(1912)는 ‘외척의 전횡’이란 말을 썼다. 하야시는 영조·정조의 왕정으로도 당쟁의 폐단은 고쳐지지 못하다가 외척이 발호하는 악화 현상을 보였다고 서술했다.

1940년 경성제국대학 교수 다보하시 게이키(田保橋潔)의 『근대 일선(日鮮) 관계사의 연구』는 ‘세도정치’란 용어를 직접 사용한 최초의 전공 서적이다. 저자는 책 첫머리 「세도정치의 발달」에서 왜구·붕당·척족은 “이씨조선의 3대 화(禍)”이며, 그중 척족의 폐해는 최근까지 이어진 역사라고 했다. 장헌세자(사도세자) 이래 시(時)·벽(僻)의 대립,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관계를 자세히 쓰고 대원군 집정과 왕비 민씨의 대립도 세도정치의 연장으로 서술했다. 유교 망국론이 중무장하여 철옹성을 구축한 형세이다. 광복 후 오늘날까지 국사책 태반이 19세기 정치사를 ‘세도정치’로 규정하고 있는 내력이다.

당쟁은 16세기에 등장하는 사림(士林)의 붕당정치가 그 실체이다. 농업경제의 발달로 각지에 중소지주층이 늘어난 가운데 그들이 유교 교육을 통해 지식인화하면서 등장한 새로운 정치형태였다. 농업경제력을 바탕으로 각지에 세워진 서원은 관료 공급원이자 공론(公論) 형성의 현장이 되었다. 이 구도는 18세기 영·정조 시대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경화사족(京華士族)이란 새로운 정치 집단의 등장으로 변화를 일으킨다. 한양과 근교 거주 지식인 집단을 특정하는 이 용어는 새로운 경제 발달로 경향 간의 정치 경제 문화적 격차가 커짐에 따라 생긴 것이다. 정치 판도에 서울의 비중이 커졌다는 뜻이다.

유교·서양 과학 결합한 ‘기철학’ 개발

최한기 선생 초상화. 조선후기 쇄국정책 시대에 서양과학을 소개한 선각자였다. [중앙포토]

최한기 선생 초상화. 조선후기 쇄국정책 시대에 서양과학을 소개한 선각자였다. [중앙포토]

붕당정치는 17세기이래 신권(臣權)을 강조하여 재상 중심 정치를 지향하였다. 성리학을 일으킨 주자의 이상 정치가 그랬다. 18세기 영조, 정조의 ‘소민’ 보호를 내세운 ‘탕평 정치’는 이와 충돌하였다. 새로운 왕권 중심 정치에 대한 찬반으로 노론·소론 안에 완론(緩論)·준론(峻論)의 구분이 생기고, 관계에 진출한 자들 사이에 시(時)·벽(僻)의 대립이 생겼다. 시파는 탕평 정치를 지지하고 벽파는 붕당정치 고유의 재상 정치를 고집하였다. 시파의 연원인 안동김씨가 헌·철종 대에 누린 ‘세도’는 따지면 후자의 변형에 속한다. 어린 왕(순조)을 보호해 달라는 정조의 부탁을 저버린 일탈이었다. ‘세도정치의 쌍벽’ 가운데 풍양조씨가 빠지면 그 실체는 안동김씨 일족의 권력 독점 현상에 불과하다. 흥선군의 둘째 아들을 지명한 조대비는 수렴청정 3년간 국기를 바로잡기 위해 서릿발 같은 정사를 펼친다. 다음 회에 보듯이 지금까지 대원군의 업적으로 알려진 서원 철폐, 경복궁 중창 등이 모두 대비가 이룬 업적이다. 19세기 정치사가 새롭게 조명될 필요성이 절실하다.

지식인 세계의 텍스트도 달라졌다. 청나라로부터 들어오는 신서적들은 주자학의 텍스트와는 전혀 달랐다. 최한기(1803~1879)의 일생은 시대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 예이다. 그는 개성 출신이었으나 양부를 따라 서울로 와서 선혜청 앞 난전 거리 창동(현 남대문 시장)에서 살았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책 읽기에 전념하여 벼슬길을 멀리했다. 독서 생활로 끼니가 어려워져 낙향을 권유받았을 때도 책 구하기가 서울보다 편한 곳이 없다고 물리쳤다. 한문으로 번역된 서양 서적을 탐독하면서 서양인은 절대로 야만이 아니라고 외쳤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믿고 유교 철학에 서양 과학을 교합(交合)한 ‘기(氣) 철학’을 개발했다. 『우주책』 등 서구 과학을 소개하는 저술 10여 책을 남겼다. 그는 서울에 줄곧 살면서 『오주연문장전산고』(백과사전류)를 지은 이규경, 대동여지도 제작자 김정호, 그 외 북학파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신지식을 쌓았다.

「한양가」(1844)는 수도 서울 곳곳의 번성을 노래한다. 청나라와 일본의 수입 물산, 심지어 서양포(西洋布)까지 팔고 있는 광경이 등장한다. 북학파 인사들은 종로 육의전 거리 가까이 백탑 골(현 낙원동)에 많이 살았다. 새로운 지식에 관심이 많은 경화사족이 시장 가까이 살면서 교류하는 것은 새로운 풍경이다. 풍양조씨는 익종의 뜻을 받들어 이 새로운 변화를 왕정에 반영하기에 힘쓴 자취가 역력하다. 1841년 조인영이 최한기의 명성을 듣고 정계 영입을 제안한 적도 있다. 조대비가 흥선군의 둘째 아들을 선택한 것은 가문의 부귀보다 왕정의 기틀을 바로 잡는 새로운 전기 마련에 뜻을 담은 것이 분명하다. 국내외 시대 조류에 새로운 변화의 기운이 이는 가운데 고종은 조선왕조 제26대 왕으로 즉위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taejinyi4343@gmail.com  학술원회원. 진단학회 회장, 역사학회 회장, 학술단체연합회 회장, 국사편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고종 시대의 재조명』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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