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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걸’ 조대비 개혁 정책, 흥선대원군 치적으로 둔갑됐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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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3호 27면

[근현대사 특강] 고종의 즉위와 정계 변화 〈하〉

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 왕실의 모계 어른인 대왕대비 또는 대비가 일정한 기간 정사를 돌본다. 왕이 앉은 자리 가까이 발을 치고 정사를 듣는다고 해서 수렴청정이라고 했다. 19세기 순조·헌종·철종·고종 4대에 잇따라 수렴청정이 열려 이를 두고 일제 식민주의 역사학자들은 왕조가 망할 징조로 방점을 찍었다. ‘당쟁망국론’의 하이라이트였다. 순·헌·철종 3대의 경주김씨와 안동김씨의 ‘외척 전횡’은 그런 비판을 들을 만하다. 그러나 고종을 즉위시킨 조대비(신정왕후)의 수렴청정은 달랐다. 순조 즉위 초 정순왕후(경주김씨)는 3년 5개월, 헌종 철종 양대의 순원왕후(안동김씨)는 6년 1개월과 2년 5개월 수렴청정하고, 조대비는 2년 2개월로 그쳤다.

‘고종실록’에 조대비 지시 130건 기록

2019년 처음 공개된「 기미년 조대비 입궐일기」. 1821~25년 조대비 어머니 은진송씨가 구술한 것을 1836년 누군가 정리한 것으로 본다. 박재연 선문대 교수 소장.

2019년 처음 공개된「 기미년 조대비 입궐일기」. 1821~25년 조대비 어머니 은진송씨가 구술한 것을 1836년 누군가 정리한 것으로 본다. 박재연 선문대 교수 소장.

순조~철종 연간에 정순, 순원 두 왕후가 수렴청정 중에 내린 정무라고 할만한 처분은 찾기 어렵다. 해당 『실록』에 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임금이 의정부와 육조의 대신들과 의논하던 정무를 모두 비변사로 옮기고선, 외척 일당이 비변사 당상으로 저희끼리 국정을 농단했으니 대비의 처분 자체가 발생하지 않았다. 대비는 그 체제 유지의 후견인이었다. 비변사는 본래 국방 관련 사안이 발생하면 관련 대신들이 모여 협의 처리하던 곳이다. 조대비는 이 변칙을 중단시키고 왕이 의정부와 6조 대신들과 합석하여 정사를 주재하던 옛 체제를 복원하여 수렴청정에 임하였다. 그래서 『고종실록』에 대비가 왕의 곁에서 내린 처분과 지시가 130여 건이나 고스란히 실려 있다.

필자나 독자 여러분은 중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의정부 복구, 경복궁 중건, 만동묘 및 비 사액서원 철폐(이하 서원 철폐) 등은 대원군의 치적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고종실록』에 따르면 이 중대사들은 조대비가 직접 지시한 역사로 기록되어 있다. 조대비가 대원군과 사전에 상의한 일은 경복궁 중건 결정 하나였다. 조대비는 대원군과 협의한 사실을 밝히고 공사 주관 기구(영건도감)는 그에게 맡긴다고 했다. 대원군은 대비가 물러난 뒤 이 직책으로 실권자가 되었던 것으로 세 가지 개혁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1894년 12월 청일전쟁 중 일본인들은 서울에 한성신보사를 세웠다. 이 신문사 기자들이 이듬해 10월 8일 경복궁 안 북쪽 건청궁에서 일어난 ‘왕비 시해 사건’에 다수 가담하였다. 그중 대표적 인물인 기쿠치 겐조(池菊謙讓)는 1910년 11월 『조선 최근 외교사 - 대원군전』을 출간한다. 이 책은 「왕비의 일생」을 부록으로 붙여 왕비 (명성 후)와 대원군 두 인물을 비교하고 있다. 일본 측의 ‘왕비 시해’ 공작은 본래 새벽 4시에 종료하는 것으로 계획되었으나 대원군 동원에 시간 차질이 생겨 아침 6~8시 사이에 실행되었다. 이때 왕실의 배려로 건청궁 양관(洋館)에 거주하던 미국인 다이 장군과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틴 두 사람이 일본인들이 날뛰는 현장을 목격하고 외국 신문에 이를 폭로하여 일본이 국제적으로 크게 궁지에 몰렸다.

2007년 필자는 기쿠치 겐조의 책을 검토한 결과, 저들이 왕비 살해 주범 혐의를 벗기 위해 쓴 ‘소설’이란 것을 확인했다. (「역사 소설 속의 명성황후 이미지」 『한국사 시민강좌』 41, 일조각) 저자 기쿠치는 대원군과 왕비를 조선의 영웅으로 추켜올렸다. 왕비는 지모가 출중하고 대원군은 과단성 있는 인물이라고 했다. 왕비는 궁인 이 씨 몸에서 왕자(완화군)가 먼저 태어나 대원군이 이를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자 분노하였다. 이후 왕비의 심한 도전으로 두 사람 간의 불화가 갈수록 심해져 대원군이 왕비를 없애려는 상황이 닥쳤다. 일본인들은 이를 보고 조선의 장래를 위해 대원군을 도왔을 뿐이라고 했다. 대원군은 당쟁의 소굴 서원을 일거에 혁파하는 ‘공전의 업적을 세운’ 인물이라고 했다. 대원군 사망 후 12년이 지난 시점에 나온 날조 변명이었다. 완화군 세자 책봉부터 사실이 아니었다.

기쿠치 겐조의 저서 『조선 최근 외교사 - 대원군전』에는「 왕비의 일생」이 부록으로 수록돼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기쿠치 겐조의 저서 『조선 최근 외교사 - 대원군전』에는「 왕비의 일생」이 부록으로 수록돼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기쿠치 겐조는 6개월여 전 고사와 시사에 밝은 조선인 2~3인에게 부탁해서 자료를 모았다고 했다. 정사 수준의 저술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책이 미친 파장은 매우 컸다. 후대 한국 지식인들도 기쿠치 연원의 ‘민비’ 폄훼에 온갖 윤색과 과장을 더한 소설과 드라마를 쏟아냈다. 정비석의 소설 『민비』는 왕비를 태생적 악녀로 그렸다. 지금도 시중 서점에 소설 『민비』를 대본으로 한 아동용 만화가 버젓이 진열되어있다.

기쿠치 겐조의 ‘소설’은 2년 뒤 하야시 다이스케의 『조선통사』에서 정사로 변신한다. 전회에 소개했듯이 이 책 제13장의 제3절 ‘이 태왕의 즉위 및 대원군의 신정(新政)’에서 의정부 복구, 경복궁 중건, 서원 철폐 등이 대원군의 ‘신정’으로 서술되었다. 저자는 대원군을 과단성 있는 인물로 소개하면서 조대비를 함께 언급하였다. 조대비도 “민첩하고 과감하게 결정을 내리는” 인물이었으나 “어찌 한 부녀자의 흉중에서 나올 수 있는 일들이었겠느냐”고 하면서 “대비를 지도한 사람”이 바로 흥선대원군이라고 하였다. 흥선군은 12세 손아래였다.

역모 연루자 사면, 연좌제 첫 폐지

신정왕후 조씨로 추정되는 초상화. 조선의 마지막 대왕대비로 수렴청정을 한 마지막 왕비이다. 고서화 수집가 신모 씨 소장.

신정왕후 조씨로 추정되는 초상화. 조선의 마지막 대왕대비로 수렴청정을 한 마지막 왕비이다. 고서화 수집가 신모 씨 소장.

1940년에 나온 경성제국대학 교수 다보하시 기요시의 『근대 일선(日鮮) 관계의 연구』는 고종 시대를 다룬 최초의 전문 서적이다. 이 책은 철종 서술까지는 해당 『실록』을 이용했다. 그러나 『고종실록』은 조선총독부 사업으로 1938년에 편찬되었으므로 저자가 이 책을 쓴 시기와 겹친다. 그는 다른 사료로 『일성록』의 고종 시대 분을 활용했다. 『일성록』은 규장각의 기록 담당 직임이 작성한 왕의 정무 일지이다. 여기에 조대비의 처분이 대부분 실려 있다. 다보하시 교수는 이 자료를 읽고 의정부 복구와 경복궁 중건이 대원군의 치적이 아니란 것을 알고 서원 철폐 하나만 남겼다. 조대비 발의로 시작된 이 사안이 대원군 ‘집정’ 시기에 뻗치고 있어 대원군 치적으로 살려 남겼다. 저자 특유의 실증주의의 묘한 실루엣이다.

조대비 처분 130여 건 가운데 인사 관련이 45건으로 가장 많다. 그중 25건이 고위 관료의 부패 단죄이다. 다음으로 많은 것이 3정(전정, 군정, 환정) 문란 시정 17건이다. 철종 12년(1862) 2월에 ‘진주민란’이 일어나자 조정은 개혁적 인사 박규수를 안핵사로 내려보냈다. 박규수는 현지 상황을 파악한 뒤 삼정이정청(三政釐正廳) 설립을 건의하여 사태를 수습해나갔다. 당시는 안동김씨 순원왕후 사망 5년 뒤로 조대비가 왕실 어른으로 사태 수습에 나설 수 있었다. 고종 즉위 후 수렴청정 시기에 내린 3정 관련 처분은 그 연장 선상의 조치였다. 4년여에 걸친 조대비의 처분 덕분으로 고종 즉위 후 농민 동요는 잦아들었다.

조대비는 고종 1년 2월에 의정부 기능을 복구하고, 4월에 전국의 서원과 사당(祠堂) 소유 토지 및 불법 인력 장악 실태 조사를 명령하였다. 이듬해 4월에 경복궁 중건 건을 발의하여 시·원임 대신 전원과 논의하였다. 세 가지 일이 조대비 업적이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밖에 주목할 것은 고종 1년 7월에 내려진 역대 주요 ‘역모’ 사건 연루자 137명에 대한 사면령이다. 조대비는 새 임금은 조상의 ‘죄’로 후손 인재들이 나라에 봉사하지 못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 사면 처분을 내렸다. 의정부를 비롯해 주요 기관의 반대 연명 상소가 잇따랐으나 조대비는 굽히지 않았다. 멀리 인조 초의 폐모론 연루자, 영조 즉위를 반대한 무신년 반란 주모자들, 심지어 순조 6년 죄인으로 축출당한 경주김씨 벽파 중심인물 등이 사면 대상이었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연좌제 폐지였다. 조대비는 고종 3년 1월 1일 12~17세 처녀 혼인 금지를 명했다. 왕비 간택을 위한 이 지시 후 2월 초에 수렴청정을 거두었다.

조대비는 ‘진주민란’을 계기로 안동김씨 부패 세력을 밀치고 개혁적 인사들을 조정에 불러들여 이들이 받들만한 임금으로 대원군의 둘째 아들을 선택해 수렴청정 2년여 기간에 왕정 수행의 기초를 닦아주고 물러났다. 1890년 4월 조대비가 사망하고 8월 임금이 관련 자료를 내리기까지 한 대왕대비 지문(誌文)은 “(대왕대비는)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와 같은 성인(聖人)으로 수렴청정 때 종묘사직에 큰 공을 남기고 온 나라에 덕이 미쳐 위태하던 나라를 반석같이 다져놓았으니 역사책에서 볼 수 없던 업적”이라고 했다. 조대비는 지금까지 역사에 보지 못한 일을 한 근대 지향의 ‘여걸’이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taejinyi4343@gmail.com 학술원회원. 진단학회 회장, 역사학회 회장, 학술단체연합회 회장, 국사편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고종 시대의 재조명』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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