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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순종실록, 1만여 종 공문서 자료 빼 일제 통치 정당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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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7호 29면

[근현대사 특강] 일제 식민주의가 남긴 멍에 〈하〉

고종 시대사는 서로 다른 견해가 엇갈리고 대립하기도 하여 혼란스럽다. 필자처럼 긍정적으로 보려는 연구자가 있는가 하면 대표적인 실패의 역사로 보는 견해와 해석도 많다. 필자는 국왕의 위상이 바닥으로 실추한 상황을 그대로 두는 것은 곧 머리 없는 역사로서 바른 역사상이 될 수 없다는 견지에서 고종과 그 정부의 치적을 새롭게 주목하는 것일 뿐인데 국왕 중심 역사관이란 소리를 듣는다. 한국 근대사, 과연 이대로 좋은가. 학문으로서의 요건은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지부터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1,2 일본인들이 편찬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 [중앙포토], [사진 이태진·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2 일본인들이 편찬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 [중앙포토], [사진 이태진·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근대 학문으로서 한국사는 ‘근대’와 함께하지 못했다. 1895년부터 정부가 신식 역사 교과서를 발행하기 시작했으나 역사 연구 인력을 키우는 교육기관을 발족시키기도 전에 국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국권 상실 후에는 뜻있는 지식인들이 대부분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에 나서게 됨으로써 온전하게 역사 연구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해외에서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1915)가 나온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 책이 나오자 조선총독부는 당황하여 조선 민족의 주체적 역사 인식을 초장에 제압하기 위해 ‘반도사 편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는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힘으로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한 뒤에 시베리아에서 상해로 와서 중국 지식인들도 읽을 수 있도록 한문체로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12)를 간행하였다.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민족사에 대한 이만한 성과가 잇달아 나온 것은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 자체가 ‘역사적 산물’로서 근대 역사학의 체계를 온전하게 갖춘 역사학의 성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제 치하에서 개인적으로 일본 대학에 유학하여 신식 역사학을 공부한 사람이 나오기는 했으나 그들 가운데 근·현대사를 전공하는 사람은 없었다.

『실록』 영인본 덕에 60년대 ‘국학 붐’

1945년 광복 후 1960년대 후반에 ‘국학 붐’이 일어났다. 대학교 제도가 안정을 찾으면서 일제 식민주의로 얼룩진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 알기 위한 새로운 출발이었다. 이때 근·현대사 분야에서 위 두 책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국학 붐’도 초기에는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지녔다. 위 두 책의 영향으로 근대사 연구자들 다수가 독립운동에 관한 논문을 많이 썼다. 그러나 민족주의 역사학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조류로서 그것이 근대 역사학의 실체가 될 수는 없다. 구미의 근대 역사학은 흔히 “과거를 평가하려고 하기 전에 ‘있는 사실 그대로(wie es eigentlich gewesn)’를 먼저 밝히라”라는 랑케의 명언으로 대변된다. 과학으로서 역사학은 곧 근거 있는 역사의 서술로서 사료 편찬 작업이 필수라는 뜻이다. 우리의 ‘근대’에는 그런 기초를 닦을 시간이 없었으며 이 결함을 채울 때까지 학문으로서의 한국 근대사를 말하기 어렵다.

3 고종 황제. 4 순종 황제. [중앙포토], [사진 이태진·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3 고종 황제. 4 순종 황제. [중앙포토], [사진 이태진·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사는 일제 치하의 치명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국학 붐’ 이후 빠르게 성장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이 신빙성 높은 사료로서 연구자들에게 영인본으로 일찍 제공된 것이 빠른 성장의 동력이 되었다. 『실록』은 한 왕의 시대가 끝나면 그 재위 기간에 생산된 각급 기관의 기록을 모아 취사선택하고 편년체로 정리하여 후대에 그 왕의 정사를 생생하게 읽을 수 있게 한 편찬물이다. 편찬이 완료되면 너댓 벌을 활자로 인쇄하여 사고(史庫)에 비치하였다. 조선왕조 『실록』은 편찬 후 어떤 후손 왕도 볼 수 없는 원칙을 세워 편찬의 객관성을 보장하였다. 중국 역대 왕조의 『실록』은 편찬 후 공개가 허용되어 기록의 객관성이 훨씬 떨어지고 분량도 우리 것에 미치지 못한다. 한마디로 조선왕조는 왕이 바뀔 때마다 근대성을 지닌 ‘사료 편찬’ 사업을 해온 세계 역사상 유일한 나라였다.

필자가 1990년대 초 서울대 ‘규장각 도서’ 관리 책임자로 소규모 견학단을 인솔해 일본 도쿄대학의 ‘사료편찬소’를 공식 방문하였다. 그때 국제부장직의 교수가 8층 건물의 자료 보관실을 위층에서 아래로 안내해 주었다. 4층인가 『대마도종가문서』와 영인본 『조선왕조실록』이 함께 비치되어 있는 방에 들어섰을 때 필자는 일본 교수에게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저 종가문서와 같은 1차 문서자료가 많아서 좋겠다고 부러워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무슨 말씀이냐고 손사래를 쳤다. 그는 오히려 『실록』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역사학자들이 부럽다고 했다. 도쿄대학 사료편찬소는 1869년 창설 후 지금까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1차 문서자료를 가져와서 뒤늦게 일본식 『실록』을 편찬하느라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당황스러움과 감격을 동시에 느꼈다. 제집의 보석 귀한 줄을 제대로 깨닫는 견학이었다.

일본 비중 높이고, 미국과의 기록 축소

그렇다! 저 독일의 랑케 사학도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Historical Monuments of the Germans, 1826~)』 편찬을 배경으로 나온 것이 아니던가. 제1차 세계대전 후 구미 인문학계는 1920년 국제연맹 탄생과 때를 같이하여 국제학술원 연합(UAI)을 창설하여 인류 평화 공존에 이바지하는 인문학을 표방하여 ‘문명’ 연구를 제일 과제로 삼았다. 그리스-로마, 비잔틴, 이슬람, 게르만 등 문명권 상호 간의 이해 증진을 위해 연구에 필요한 문명권 관련 자료 편찬사업을 지원 과제(Patronized Project)로 삼아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 편찬사업이 각 회원국 학술원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속에서 프랑스의 아날학파 역사학이 나오고 아놀드 토인비의 ‘문명 사학’이 출현하였다.

미국은 국제연맹과 국제학술원연합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서도 상원이 국제연맹 가입을 허용하지 않아 정작 회원국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미국 역사학은 그래서 유럽 역사학에 뒤지는 형세를 면치 못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대규모 전사(戰史) 편찬사업을 일으켜 사료를 다루는 전문 인력을 대폭 양성하고 연구력을 갱신하여 유럽 역사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어느 것이나 사료 편찬을 거치지 않은 역사학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교훈이다.

5 『조선왕조실록』. 태조~철종 간 총 1893권 888책. 6 박은식의 『한 국통사』. ‘통사’는 아픈 역사란 뜻이다. [중앙포토], [사진 이태진·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5 『조선왕조실록』. 태조~철종 간 총 1893권 888책. 6 박은식의 『한 국통사』. ‘통사’는 아픈 역사란 뜻이다. [중앙포토], [사진 이태진·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는 1980년대 『실록』의 영인본을 간행하여 국내외 연구자들이 이를 쉽게 이용하게 함으로써 한국사는 조선 시대 연구를 중심으로 짧은 시간에 크게 발전하였다. 『실록』이 각 왕대의 1차 사료를 정리한 성과물이었으므로 연구자들에게 그만큼 시간 단축의 효과를 안겨주었다. 그런데 근대사는 그렇지 못했다. 『고종실록』 『순종실록』의 편찬 자체에 깊게 박힌 일제 식민주의 골조가 멍에로 남은 탓이다. 1926년 순종 황제 붕어 후 1927년부터 8년간 고종, 순종의 실록 편찬사업이 진행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이왕직(李王職)’ 사업으로 조선사편수회가 수행한 장기 사업이었다. 어느 모로나 일제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는 쪽으로 기울 사업이었다.

두 『실록』 편찬사업은 고종 시대 국제 관계에서 일본의 비중을 높이고, 조선이 중시한 미국과의 수교 기록은 의도적으로 줄였다. 1882년 미국 에디슨 전등회사와 계약하여 이루어진 왕궁 내 전기 시설 관련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1898년 황실 자금으로 설립한 한성전기회사가 미국 콜브란-보스트윅사 기술제휴로 서울 시내에 전기를 시설하고 전차를 달리게 한 엄청난 근대화 사업도 전차에 사람이 치인 사고 기사에 세주(細註)로만 설립 사실을 간단히 밝혔다.

1904년 러일전쟁 후 일제는 무력을 배경으로 한국 정부의 주요 기관을 장악하여 황제가 침략행위에 앞장선 일본 군인과 관리에게 손수 훈장을 내린 것처럼 보이도록 꾸몄다. 두 『실록』은 이에 관한 기록을 빠짐없이 실어 국가 원수가 저들의 활동을 인정했다는 증거로 남겼다. 두 『실록』 편찬사업에 관한 최근의 한 연구는 이 편찬사업이 정작 고종 시대 근대화 사업 추진 중에 생산된 정부 공문서 1만1000여 종에 달하는 자료를 의도적으로 외면한 사실을 밝혔다.(중앙일보 2022년 7월 11일자 14면) 두 『실록』 편찬사업은 후세에 일본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튼튼한 골조 구축 작업이었다.

2000년대부터 시작된 『실록』의 온라인 제공에 『고종실록』 『순종실록』도 미처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번역본까지 갖추어 온라인으로 공개되었다. 일제 식민주의 역사가 비전공자를 상대로 양산되는 상황이 빚어졌다. 일제가 고의로 제외한 정부 공문서 자료를 모두 활용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료 편찬사업만이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필자 사정으로 이번 주 쉽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taejinyi4343@gmail.com 학술원회원. 진단학회 회장, 역사학회 회장, 학술단체연합회 회장, 국사편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고종 시대의 재조명』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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