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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시시각각

‘잃어버린 30년’ 탈출하는 일본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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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김동호 논설위원

김동호 논설위원










디플레이션 사실상 막 내리고
반도체 부활에 임금도 오름세
한국에 미치는 영향 주시해야

일본 경제가 꿈틀댄다. 30년 만의 변화 조짐이다. 1990년 무렵 버블경제의 직격탄을 맞은 일본인들은 좀처럼 주식을 사지 않는다. 지금도 장롱에 현금을 보관하는 사람이 많다. 제로금리 때문에 은행에 예치할 필요가 없어지자 현금 수십억 엔이 담긴 상자를 창고에 보관했다가 돈이 썩었던 사건도 있었다.

버블경제 이후 주가는 4분의 1 토막 나고, 미국에 투자했다가 환율 변동으로 깡통을 차고, 부동산이 폭락하면서 일본인들은 투자 기피증이 극심했다. 증시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랬던 일본에서 주식투자 붐이 불고 있다. 닛케이지수가 3만 엔을 돌파하자 주식매수 대기자금이 15조 엔까지 불어나 1997년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도쿄 중심부 히가시 긴자에서 황금연휴 중인 지난 5월 3일 일본인들이 어우러져 축제용 가마를 메고 '마쯔리'를 즐기고 있다. 최근 살아날 조짐을 보이는 일본 경제를 반영하는 듯 표정들이 밝다. 연합뉴스

도쿄 중심부 히가시 긴자에서 황금연휴 중인 지난 5월 3일 일본인들이 어우러져 축제용 가마를 메고 '마쯔리'를 즐기고 있다. 최근 살아날 조짐을 보이는 일본 경제를 반영하는 듯 표정들이 밝다. 연합뉴스

무엇보다 큰 변화는 임금이다. 일본은 지난 30년간 임금이 제자리에 멈춰 있었다. 도쿄대를 졸업한 신입사원 월급이 한국의 월 최저임금보다 못한 22만 엔 근처부터 시작한다. 그랬던 일본이 임금 올리기에 나섰다. 유니클로를 만드는 패스트리테일링은 대졸 사원의 월급을 25만5000엔에서 30만 엔으로 올렸다. 대만 TSMC를 유치한 구마모토 공장은 이 지역의 평균 급여보다 40% 많은 28만 엔을 준다. 임금이 오르자 이직도 활발해졌다. 일본생명보험은 이직 방지를 위해 5만 명에 이르는 직원의 평균임금을 7% 인상했다.

임금 동향은 일본은행의 최대 관심사다. 물가상승률이 3%를 넘어서면서 사실상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했지만, 지속하기 위해선 임금이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제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방 중소기업에도 30년 만에 임금 인상의 기운이 퍼져나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올해 임금 인상률이 ‘대기업은 3.58%, 중소기업은 3.23%에 달했다’면서다. 인재 확보를 위해 스톡옵션·종업원지주제를 통해 성과를 주식으로 나눠주는 기업도 최근 5년 사이 10배로 뛰었다.

이런 변화의 배경엔 저출산·고령화로 인력 부족이 극심한데도 임금이 30년째 같아서는 상황 반전이 어렵다는 위기의식이 있다. 이에 맞춰 일본 정부가 정책을 내놓으면서 이윽고 임금이 오르고, 여성들이 아이 키우기 편하고 일하기 좋은 환경으로 제도를 개선하자 여성 고용률도 빠르게 올라가고 있다. 인구가 곧 국가 경쟁력이기 때문에 2070년까지 총인구 중 ‘외국인 10%’를 목표로 내세운 해외 인재 유치 정책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

마침 불어닥친 글로벌 인플레이션은 일본 경제의 ‘가미카제(神風)’가 되고 있다. 일본 경제가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반응하면서다. 임금뿐 아니라 대도시 집값이 급등하고, 땅값 상승률도 1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일본 기술이 최고라는 자만심도 버리고 미국·대만 반도체 기업과 손잡고 반도체 공장을 줄줄이 들여오고 있다.

일본이 디플레이션에서 완전히 탈출하면 한국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일본은 미·중 대립 속에 한·미·일 협력 폭을 넓히면서 4년 만에 수출규제 조치를 해제했지만 치밀하게 경제안보를 강화하고 있다. 미국이 일본의 반도체 부활을 밀어주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이 반도체 경쟁력을 잃게 된다면 일본의 경제안보 강화는 언제든지 한국 기업에 위협이 될 수 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의 출구에 서 있다면, 한국은 ‘잃어버린 10년’의 터널에 들어섰다는 점이다. 최근 만난 삼성전자 전 최고경영자는 최근 10년 정도 소모적 정쟁을 벌여 온 정치권의 행태를 안타깝게 여기면서 “한국은 이런 시기를 앞으로 10년 더 보낼 것 같다”고 걱정했다.

도심 재생에 박차를 가해 도쿄·오사카 도심이 별천지가 된 것도 놀랍다. 낡은 벽에 페인트나 칠했던 서울은 상대적으로 우중충해졌다. 물론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결정하고 산더미처럼 쌓인 국가부채는 일본의 한계를 드러낸다. 경쟁력 있는 빅테크 기업이 없는 것도 일본 경제의 약점이다. 하지만 일본의 역동적 변화는 한국이 신발 끈을 조여 매야 할 자극이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