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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초가 드러낸 또다른 민낯…'아무데나 익명' 돈 벌면 끝인가 [현장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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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24일 서울 서초구 서이초등학교에서 초등학생들이 고인이 된 교사 A씨를 추모하고 있다. 연합뉴스

24일 서울 서초구 서이초등학교에서 초등학생들이 고인이 된 교사 A씨를 추모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이초 학교이야기 보니 실명 거론되네요”
지난 19일 저녁, 다수의 인터넷 커뮤니티에 이런 제목의 글이 퍼졌다. 서울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극단적 선택 사건이 보도된 지 몇 시간 후의 일이다. 네이버 ‘학교 이야기’는 네이버 검색창에 특정 학교 이름을 검색하면 상단에 노출되는 실시간 댓글 서비스다. 누구나 익명으로 글을 올릴 수 있다. 다수의 목격자에 따르면, 이날 저녁 이 게시판에는 특정 정치인의 실명이 삭제되면 또다시 올라왔다. ‘권력자의 압력으로 삭제하느냐’라는 음모론도 제기됐다.

비슷한 시각, 회원 41만의 네이버 맘카페에 ’가해 학생의 할아버지는 국힘 3선 의원’이라는 내용의 글이 게시됐다. 그러나 당사자로 지목된 한기호 국민의힘 의원은 다음날 “그 학교 다니는 손주 없다”라고 해명했고, 맘카페 글 작성자를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서이초 사건은 한국 공교육의 현실 뿐 아니라 인터넷 문화의 현실도 드러냈다. 표현할 권리를 주장하나 책임은 없고, 플랫폼은 트래픽(접속량)을 키워 광고로 돈 벌면서도 관리에 부실하다.

‘예의있게 쓰라’고 공지하면 끝인가

21일 아침 네이버는 “미확인 사실에 대한 댓글이 지속해서 게재되어 학교이야기 서비스를 임시 중단한다”라고 공지했다. 삭제 등 조치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문제 게시물이 올라와 “본연의 목적인 ‘학교생활 정보 공유’에 어려움이 발생했다”라는 것.

21일 네이버가 학교별 익명 채팅 서비스 '학교이야기'를 임시 중단했다. 사진 네이버

21일 네이버가 학교별 익명 채팅 서비스 '학교이야기'를 임시 중단했다. 사진 네이버

네이버는 해당 서비스 소개 글에 “학교이야기는 초등학생을 위한 서비스”라며 “에티켓을 준수해 달라”라고 적어놓았다. 그러나 예고된 사태라는 지적이 나온다. 학교별로 익명 댓글창을 운영하면서 재직 교사·재학생 확인 절차도 없으며, 네이버 아이디만 있으면 누구나 글을 올릴 수 있어서다. 아이엠스쿨 등 주요 학교 정보 앱들은 학교별로 실명 게시판을 운영한다.

지적은 앞서도 있었다. 지난 2017년 초등학교 교사가 스쿨톡(학교이야기의 이전 이름)을 통해 성희롱과 인신 공격에 노출됐다며 시민단체가 네이버에 “스쿨톡을 폐쇄해달라”는 성명서를 냈지만 서비스는 계속됐다. 현재 네이버는 ‘명예훼손 등 권리 침해를 입었다면 게시물의 게시 중단을 요청할 수 있다’고 안내하고 있지만, 사후 조치일 뿐이다.

‘익명 품평’이 키우는 ‘감정노동 지옥’

익명으로 각종 ‘품평’을 하는 플랫폼의 후기 게시판들도 마찬가지다. 138만 명이 가입한 자영업자 네이버 카페 ‘아프니까 사장이다’에는 배달 앱 리뷰에 관한 자영업자들의 고충이 올라온다. 리뷰를 빌미로 한 과도한 덤 요구나 악성 리뷰로 인한 피해 호소다. 얼굴 보고는 못할 말을 비대면에 기대 마구 쏟아놓는, ‘전 국민의 금쪽이화(化)’다.

배달의민족 운영사인 우아한형제들은 “신고 접수된 악성·허위 리뷰는 30일간 숨기고, 자체 모니터링도 진행한다”라며 “다만 리뷰는 저작권이 인정되는 저작물이라 게시자 동의 없이 임의 삭제할 수 없다”라고 설명했다.

문제는 익명 품평 병폐의 파급효과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익명성으로 증폭된 품평·혐오·갑질 같은 온라인 상의 폐단이 오프라인 문화로 넘어오는 악순환이 생긴다”며 “감정노동이 사회 전체에 증폭되는 측면이 있다”라고 말했다.

표현의 자유, 집단 지성 같은 플랫폼의 순기능이 작동하려면 철학이 있어야 한다. 초등학교가 온라인 익명 커뮤니티를 필요로 하는 영역인지, 어떻게 건강한 소통을 만들지, 고민한 흔적이 없다면 ‘플랫폼이 갈등과 잡음으로 돈 번다’는 비판 또한 피할 수 없다.

심서현 IT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