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경호의 시시각각

K규제 참 끈질기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다른 나라에선 다들 하는데 우리만 못하는 사업이 여전히 많다. 대부분 사업자단체로 대표되는 기득권과의 갈등을 넘지 못하는 탓이다. 사업자단체의 직역 이기주의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영부영 눈치만 보고 결정을 못 내리는 정부도 문제다.

8년을 끌어 온 법률서비스 플랫폼 ‘로톡’과 대한변호사협회의 갈등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로톡에 가입한 변호사를 무더기로 징계한 변협 처분이 정당한지 법무부가 20일 심의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미 검찰도, 헌법재판소도, 공정거래위원회도 로톡 손을 들어줬다. 그런데도 반년이 넘도록 법무부가 결정을 못 내리고 있다. 답답한 일이다. 그 사이 로톡 소속 변호사는 절반이 줄었고, 로톡은 직원 절반을 구조조정해야 했다. 법무부가 시대적 흐름이라고 했던 리걸테크가 꽃을 피우기는커녕 고사할 위기에 몰렸다.

법무부 로톡 심의, 대체 언제까지
비대면 진료 플랫폼은 사업 포기
외국은 혁명 중인데 우린 뭐하나

변협은 플랫폼에 광고비를 많이 내는 변호사만 유리해진다고 주장한다. 소비자 편익이 기준이 돼야 한다. 민사소송 10건 중 7건이 변호사 없는 ‘나 홀로 소송’이다. 로톡은 소비자의 법률 서비스 접근성을 높여줄 것이다. 전 세계 리걸테크 기업이 7000여 개에 달하고 기업 가치가 1조원을 넘는 유니콘 기업도 7곳이나 나왔는데, 한국 리걸테크는 숨만 쉬기에도 벅차다. 로톡뿐이 아니다. 세금환급서비스 ‘삼쩜삼’은 한국세무사회와, 성형정보 플랫폼 ‘강남언니’는 대한의사협회와, 비대면 의료플랫폼 ‘닥터나우’는 대한약사회와 갈등 중이다.

어정쩡한 시범사업에 갇힌 비대면 진료도 답답하다. 시범사업 한 달여 만에 서비스를 포기하는 플랫폼 업체들이 줄을 잇고 있다. 서비스 범위가 동네 의원과 재진 환자 위주로 축소되고 약 배송도 금지되니 소비자들이 외면할 수밖에. 우리 국민은 코로나 시기 3년간 의료사고 없이 3661만 건의 비대면 진료를 경험했다. 그런데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IT)을 자랑하는 한국만 원격의료를 법제화하지 못했다.

너무 오랜 관행이어서 규제라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우유가격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원유(原乳)값은 낙농가와 우유회사가 협상으로 정한다. 2002년 쿼터제가 도입되면서 할당량을 우유회사가 전량 매입한다. 지난해 낙농가 생산량보다 쿼터가 더 많았다. 올해부터 용도별 차등가격제가 적용돼 생산비 이외에 시장 상황도 고려한다고 하지만 생산자 위주의 결정 시스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낙농가 보호도 좋지만 시장 여건이 녹록지 않다. 국산 우유의 절반 가격인 폴란드산 멸균우유 수입이 크게 늘고 있다. 2026년부터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유제품 관세가 폐지되면 수입 멸균우유는 더 싸진다.

더 무서운 것은 기술 혁신의 파고를 피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콩·아몬드·귀리 등 식물로 만든 대체유가 미국 우유 시장의 15%, 서유럽의 11%를 차지했다. 미생물이나 효모 등을 이용해 낙농제품을 만드는 인공 낙농업에 전 세계 스타트업들이 뛰어들었다. 인공 낙농은 물 적게 쓰고 온실가스를 덜 배출하며 항생제 쓸 일도 없고 어디서나 쉽게 만들 수 있다. 알레르기나 성인병을 유발하는 특정 성분을 빼고 유제품을 생산할 수도 있다.

싱가포르는 2020년 동물세포를 실험실에서 배양해 고기 형태로 만드는 배양육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승인했다. 미국은 지난달에야 허용했다. 식품의 90% 이상을 수입하는 싱가포르가 2030년 식품의 30% 자급을 목표로 잡았다. 공급망 충격에 대비해 안전벨트를 매겠다는 거다. 이를 위해 배양육을 비롯한 인공 낙농 스타트업에 실험 기자재를 지원하는 등 전력투구 중이다. 덕분에 전 세계의 식품 스타트업이 싱가포르에 몰리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이를 ‘무혈혁명’이라고 표현했다. 나라 밖에선 지금 혁명이 벌어지는데 우리는 K규제와 씨름 중이다. 무더위보다 더 진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