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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세상 가자서라” 서울 한복판 박물관서 진도씻김굿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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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22일 서울 종로구 홍지동 쉼박물관에서 88세로 타계한 박기옥 쉼박물관장(아래 사진)의 발인식이 국가무형문화재 진도씻김굿과 함께 진행됐다. [사진 강형원 한국유산기록가]

22일 서울 종로구 홍지동 쉼박물관에서 88세로 타계한 박기옥 쉼박물관장(아래 사진)의 발인식이 국가무형문화재 진도씻김굿과 함께 진행됐다. [사진 강형원 한국유산기록가]

“가자서라 가자서라 극락세상 가자서라/ 이 세상 인연 다 버리고 좋은 세상 가자서라….”

망자를 향해 극락왕생 하시라면서 손길은 작은 빗자루로 솥뚜껑을 빗질하기 바쁘다. 하얀 소복에 쪽진머리를 한 진도씻김굿 전승자 양용은씨의 ‘곽머리씻김’과 ‘영돈말이’. 향물·쑥물·정화수에 빗자루를 적셔 정성스레 영돈과 관을 씻는 의식이다. 영돈(혹은 영돗)이란 돗자리에 망자의 옷을 펴서 둘둘 말아 세우고 그 위에 넋그릇과 솥뚜껑을 얹은 것으로 망자를 상징한다.

이어지는 ‘길닦음’에선 망자의 넋을 반야용선(작은 상여 모형)에 태워 저승 가는 길을 닦아 준다. 잿상에서 마당 끝까지 길게 펼친 광목천을 부여잡고 고(故) 박기옥 쉼박물관장의 영정을 앞세운 유족들이 연신 눈물을 훔쳤다.

지난 18일 88세로 타계한 박기옥 쉼박물관장. [사진 박기옥 유족]

지난 18일 88세로 타계한 박기옥 쉼박물관장. [사진 박기옥 유족]

지난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홍지동 쉼박물관에서 펼쳐진 풍경이다. 닷새 전인 18일 88세로 타계한 박 관장 발인일에 국가무형문화재 진도씻김굿을 보유자·이수자 11명이 약식으로 풀어냈다.

평생을 진도씻김굿 전승에 바친 박병천(1933~2007)의 큰딸 박미옥과 며느리 양용은, 1호 제자 강은영 등 세 무녀가 총출동했다. 징·장고·꽹과리·피리·대금·해금·아쟁 등 악사 8명이 장단을 맞추는 가운데 약 50분간 이어진 절절한 고별 의식에 남상신 드라코 홍콩 대표를 비롯한 자녀들(3녀 1남)과 사위 장세주 동국제강그룹 회장 등 유족과 조문객 약 150명이 함께 했다.

진도씻김굿은 망자를 불러 맺힌 한을 풀어주고 자유롭게 이승을 떠나도록 돕는 의식이다. ‘씻김’이란 말처럼 남은 이들의 슬픔을 씻어주며 연희를 통해 망자를 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원래는 출상 전날 시신 옆에서 밤새 소리와 춤의 향연으로 이뤄지지만 이날은 이례적으로 발인일에, 그것도 야외 뜰에서 펼쳐졌다. “생전에 한국 전통 상여문화를 보존하고 알리는 데 앞장선 고인을 그냥 보낼 수 없다”는 김종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의 제안을 유족들이 받아들이면서다. 상주이자 고인의 외아들인 남 대표는 “어머니께서 생전 사랑하신 상여 의례를 통해 많은 분들의 위로를 받아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이날 발인식에선 고인과 이웃사촌으로서 각별히 지낸 가객 장사익이 ‘귀천’과 ‘봄날은 간다’를 부르기도 했다.

유족들에 따르면 이화여대 사학과 1회 입학생인 고인은 결혼 후 가정에만 집중하다가 2005년 남편(남방희 전 한려개발 회장)을 먼저 보낸 후 죽음도 인간의 생명운동 과정에서 하나의 ‘쉼’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2007년 살던 집을 쉼박물관으로 개조해 지하 1층, 지상 3층에 걸쳐 전통 상여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장례 유물들을 상설 전시하고 관련 기획전을 열었다. 그는 평소 “우리 대통령 장례식은 서양처럼 검은 리무진으로 운구하지 말고 전통 상여 의식으로 해서 세계에 우리 문화를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을 만큼 장례의 전통계승에 큰 관심을 쏟았다.

진도씻김굿 보존회 김오현 회장에 따르면 진도씻김굿이 서울에서 공연(추모제)의 형태가 아니라 실제 장례 의식으로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영결식 때 각각 고향인 경남 김해 봉하마을과 전남 신안 하의도에서 진도씻김굿이 펼쳐진 바 있다.

눈물의 배웅이 끝나고, 평소 “예식은 경건하되 쉼터는 간소해야 한다”는 고인의 지론대로 별도 장지 없이 경기도 이천 납골당에 유골함이 봉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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