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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질주로 굳어진 대립 구도, 단기간에 소멸되진 않을 것 [6·25 정전협정 체결 70주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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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9호 11면

SPECIAL REPORT

한반도에 정전이 선포된 지 70년이 지났지만 온전한 평화는 여전히 요원한 상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보듯 협정은 평화를 보장하지 못한다. 더욱이 정전이란 미완의 단계는 전쟁이 재발할 수 있는 더 큰 위험성을 내포한다. 국가 간 전쟁은 최종적으로 평화협정을 통해 마무리된다.

그런데도 지난 70년 한반도의 극한 대립이 전쟁으로 비화하지 않은 여러 요인 중 핵심은 한·미동맹이다. 1953년 체결돼 역시 70주년이 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주한미군의 한반도 주둔을 통해 북한에 대한 확실한 억제 기제로 작동해 왔다. 북한이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려면 주한미군을 공격해야 하며 이는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가 되기 때문이다.

한반도에는 그동안 정전체제에서 탈피해 평화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수차례 있었다. 특히 1990년대 공산권 붕괴로 맞이한 탈냉전은 1953년 이후 지속된 한반도 대립 구도가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노태우 정부가 추진한 북방정책도 남북이 각각 옛 소련과 중국, 미국·일본 등과 수교하는 ‘교차 승인’을 통해 냉전의 굴레를 벗으려는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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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북한도 일면 호응하면서 1991년 핵 문제 해결을 위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채택됐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북한은 결국 핵무장을 선택했다. 이후 북한이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며 초래된 북핵 위기는 숱한 부침 속에서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올해로 30년을 맞게 됐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이렇듯 정전 70년은 결국 한·미동맹 70년, 북핵 위기 30년과 복합적으로 연계된다. 북한의 핵무장 전략과 이를 억제하는 한·미동맹이 팽팽히 맞선 형국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북한이 핵을 고도화할수록 한·미동맹을 더욱 강화하는 동인으로 작용해 왔다는 점이다. 그런 만큼 북핵이 초래한 역동성을 다각도로 분석하는 것은 정전체제의 해체 가능성을 살피는 유용한 길이 될 수 있다.

북한은 지난해에만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8발을 포함해 33차례에 걸쳐 70여 발의 미사일을 발사했다. 한 해 기준 역대 최다 규모다. 올해도 핵 질주를 계속해 새로운 고체연료 기반인 화성-18형 등 ICBM만 4차례나 쏘아올렸다. 북한은 2018∼19년 잠시 추진했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2019년 말 제7기 5차 전원회의 때 ‘정면돌파’를 선포하며 마감한 뒤 대남·대미 강경 노선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북한이 고수하는 원칙은 네 가지로 요약된다. ‘사상투쟁’을 통해 북한 주민을 통제하고, ‘자력갱생’으로 외부 도움 없이 경제를 굴리며, ‘핵 고도화’를 성취해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기 위한 ‘장기전’을 전개하는 것 등이다. 한마디로 최대한 버티면서 한국은 물론 미국 본토까지 타격할 수 있는 핵 능력을 확보하는 전략인 셈이다.

능력과 더불어 의지 측면도 강조한다. 지난해 4월 25일 김정은은 열병식에서 “우리 국가의 근본 이익을 침탈하면” 핵을 사용한다는 ‘둘째가는 사명’을 발표했다. 전문가들이 ‘4·25 독트린’으로 명명할 만큼 공격적인 핵전략이다. 핵 사용 조건을 모호한 국가 이익과 연계했다는 점에서다. 지난해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핵무력 정책’도 자의적 핵 사용을 가능케 했다. 특히 “인민의 생명과 안전에 파국적인 위기”가 조성될 때 사용할 수 있다는 조항은 매우 확장적이다. 사실상 언제, 어느 환경에서도 핵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의지를 최대치로 천명한 것이다.

북한의 핵 질주는 국제사회에서도 완전한 북한 비핵화를 일종의 ‘환상’으로 치부하는 여론을 조성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 내에서도 북한을 ‘사실상(de facto)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고 핵 군축과 비확산에 치중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될 정도다. 이는 북한이 지난 30년, 더 나아가 정전 후 70년간 기다려 온, 한국에 대해 완벽한 우위에 서는 ‘별의 순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핵 보유를 암묵적으로 인정받고 일부 제재도 해제된 북한은 비핵 국가인 한국에 강압 외교를 구사하며 주도권을 행사하고 최종적으로 ‘영토 완정’의 꿈을 성취하려 들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이 같은 전략은 의도대로만 되지 않고 오히려 역작용에 직면해 있는 게 현실이다. 무엇보다 한·미 양국이 확장억제를 최대한 강화하며 북핵의 효용성을 낮추고 있다. 지난 4월 한·미 정상은 워싱턴 선언을 통해 북핵 억제를 위한 공조에 합의하고 구체적인 핵전략 기획 논의를 위한 핵협의그룹(NCG) 발족을 선언했다.

일각에선 워싱턴 선언의 실효성과 충분성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북한의 반응을 보면 분명한 효과가 확인되고 있다. 실제로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미가 끝나기도 전에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워싱턴 선언이 “가장 적대적이고 침략적인 행동 의지가 반영된 극악한 대조선 적대시 정책의 집약화된 산물”이라고 강력 비판했다. 이후에도 “괴뢰 역도의 구걸 행각”이란 비난을 일주일간 쏟아냈다. 확장억제에 대해 북한이 체감하는 위협이 생각보다 크다는 방증이다.

둘째, 북한이 요구하는 ‘생존권’과 ‘발전권’ 보장도 더욱 요원해졌다. 연합훈련과 전략자산 전개 영구 중단 등 생존권 요구에 한·미는 오히려 대규모 연합훈련 재개와 전략핵잠수함(SSBN) 등 ‘최종병기’ 투사로 답하고 나섰다. 사이버 공간이 막히면서 북한의 발전권 확보도 난관에 부딪혔다. 북한이 주력해 온 정보기술(IT) 기술자를 통한 외화벌이와 암호화폐 탈취 등이 한·미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각종 제재로 여의치 않게 되면서 김정은의 통치 자금도 갈수록 고갈되고 있는 실정이다.

셋째, 북한 핵은 미국이 주도하는 ‘통합억제’에도 적잖은 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미국의 통합억제는 인도·태평양 지역을 단일 전구로 상정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대서양 동맹과 역내 양자 동맹국들을 한 데 묶어 ‘승수효과’를 극대화하는 전략이다. 동맹국 간 협력을 통해 동맹국 자산과 전진 배치된 미군 전력 등을 통합해 역내 안보 위협에 대응하는 전략이 계획대로 진행될 경우 북한은 한·미·일·호주와 나토 동맹국이 결합된 거대한 안보협력체를 상대해야 한다. 북핵 억제력은 극대화되고 역으로 북핵 효용성은 최소화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정전 70년간 굳어진 한반도 대립 구도가 단기간에 소멸되긴 쉽지 않다. 특히 북한 핵이 세계를 상대로 ‘실존적 위협’을 가하는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는 여전히 난망한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북한이 그리는 ‘핵 있는 한반도’ 또한 결코 완성될 수 없고 용납할 수도 없다는 게 최근 국제사회의 공통된 합의다. 결국 북한이 정전협정일을 ‘전승일’로 부르는 ‘대결과 과시의 정치’를 중단하고 대화의 장으로 나설 때 한반도 평화의 단초는 마련될 수 있다. 한·미 공조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연대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유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 한동대 교수를 지냈으며 이화여대 통일학연구원장과 동아시아연구원 북한연구센터장, 통일부·국방부 정책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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